정치 얘긴하지 말라면서, 21세기인의 정치적 견해를 바꾸는 방법을 논하다
대체로 원제의 취지를 훼손하는 번역서 제목을 자주 봐온 터라, 역설적으로 사용된 원서의 제목보다 훨씬 직관적인 이 제목에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소 단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 책 어디에서도 ‘그러니 말하지 말게 하자’ 같은 주장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호언하죠. “정치에 대한 모든 말들에 수반되는 ‘마모 ware and tear’를 우리가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반을 재건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꽤나 염세적인 태도로 토론의 무용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책의 중간쯤에서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164쪽
적어도 내가 자란 미국에서는 “친구 사이에 정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라는 것이 경험에서 나온 일반적인 룰이다. 정치는 종교, 돈, 섹스와 함께 모임과 우정을 망치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 앞에서는 거론하지 말아야 할 주제로 꼽힌다.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그러나 우리가 친구 사이에서 하는 정치 얘기에 늘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더 나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진짜로 바란다면, 실제로 우리는 정치 이야기를 친구 사이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 얘긴 꺼내지도 마: 21세기 지성인을 변화시키는 법”과 같은 원서 제목보다는, 번역서의 제목이 훨씬 더 직관적면서도 도발적인지라 책을 펼쳐보게끔 만든다 싶습니다.
정치학자 존 허빙 등의 책,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서는 “타고난 성향을 바꾸기는 거대 유조선을 조작하는 일과 비슷하다”면서, “보통 오랜 시간 동안 전력을 다해 집중해야” 하고, 조금씩 바꿔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특히나 태도는 변화에 대한 저항성이 강한데, 정치 성향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정치 성향이 장기적으로 불변하는 안정성을 지닌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책, 『바른 마음』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사람들 안의 코끼리에게 말을 걸어야만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도덕적 직관이란 코끼리와 이성적 추론이란 기수로 구성되는데, 이성적인 대화로 설득하는 일은 좀체 어려운 일이 아닌지라, '새로운 직관‘이란 코끼리를 공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코끼리는 반대자다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몸을 틀어버리고, 그러면 기수가 정신없이 달려들어 반대자의 비난을 반박할 근거를 찾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 보니, 타인의 정치 성향을 변화시키는 것, 즉, “코끼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이루기도 쉽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레오르 즈미그로드의 책, 『이데올로기 브레인』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조언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즈미그로드는 “한번 이데올로기가 각인되면 모래에 그린 그림과는 달리 지우기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인간 뇌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무언가를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배우는 기관이지만 “교조적 체계에 푹 빠지면 몸은 기꺼이 그것에 따르는 경직성을 받아들인다”라고 지적합니다. 특히나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은 “엄격한 교리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서, “교리를 엄격하게 고수하고, 되도록 새로운 증거에 비추어 신념을 업데이트하지 않으려 저항하며, 내집단과 외집단 구성원의 정체성에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포함한다”라고 설명합니다.
1장과 5장을 통해, 18세기적 공론장에서 민주적 담론이 불가능해진 현실을 <공론장의 환상>과 <소셜미디어의 배신>으로 설명합니다.
2장과 3장을 통해서는, 앞서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적 행동의 심리>로 인해 빚어지는 <토론의 함정>을 다룹니다.
4장과 6장 그리고 7장을 통해 해결책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하지만,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지속되기 때문에 조금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긴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분석된 경험’에서 반복될 수 있는 패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보지 못한 대안’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론의 차원이 아니라 상상의 차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 학자의 정신 사나운 구성의 책에는 꽤나 많은 오타와 탈자가 교정되지 않고 나왔습니다. 문맥을 이해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아서 그냥 넘기고 읽었지만, 과연 중쇄에서는 교정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선은 중쇄가 가능할 지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니다. 갖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학자의 첫 번째 저서인지라, 다소 난잡한 구성에 잦은 동어반복으로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정치학 대중서입니다. 12.3 내란으로 촉발된 정치서적 특수가 이제 끝물인 듯해서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 좀 어려워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 각 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적들을 살펴보겠습니다만, 그전에 <들어가는 글: 포고령>에서 다음 부분을 옮기고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동원되는 개념인 ‘레케리미엔토’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12쪽
레케리미엔토 Requerimiento라 불리는 포고령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에서 새로운 원주민 무리를 만날 때면 늘 선포했던 선언문이었다. 포고령에 따르면, 원주민들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이 땅은 사실 스페인의 것이다. 교황이 스페인 왕과 여왕에게 ‘이 땅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작성된 문서와 명확한 문장으로 명시되어 있으니 여려분은 언제든지 그 문서를 볼 수 있다.” 요청하기만 하면 포고문 조항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한 바를 잘 생각해 보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논의하고 이해해 달라”고, 그런 다음 가톨릭교회와 교황, 스페인 왕과 여왕을 그들의 통치자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일방적인 최후통첩이자, 그 이상의 의무를 언급하는 사람들로부터 면책되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였다. 포고령의 낭동은 무턱대고 이루어졌다.
레케리미엔토 대로라면, 모든 사망이나 손실은 사실상 전적으로 원주민들 자신의 탓이었다.
그것은 당시 행해진 ‘여론 세탁 Whitewashing’이자 모호한 동의, 담론, 윤리적 가치에 기대어 부당한 무언가를 덜 부당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레케리미엔토의 단어들이 그랬듯이 대부분의 정치적 의사소통이 진정한 의사소통이라기보다는 강압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편리한 변명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기왕의 억압 체제의 은폐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생각의 시장 marketplace of idea이라고 불리는 신화에는 우리 사회의 정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경험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최고의 사상만이 승리하므로 그 사상은 분명 그동안 내내 옳았다”는 잘못된 믿음을 확정하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시행되고 그들이 실제로 체험해 보고 난 이후에야, 오직 그러고 나서만 자신의 견해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잊지 않고 덧붙입니다. 여기에 “자신은 유능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우리의 집착”은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확증 편향이나 자기 합리화만큼이나 악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우리는 심리적으로 일관된 상태를 갈망한다”점을 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새로운 사상을 접할 때 자주 고통스러운 인지 부조화를 경험하는데, 우리는 그 논거와 논증을 한편으로 치워버리면서 빠르게 합리화 작업에 돌입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토론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논거를 찾기 위한 과정에 가깝다”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사람들은 모호함과 긴박한 의사 결정에 압도당할 때 복잡성을 회피하려는 내재적인 경향이 있으며, 불확실성이 주는 불편함을 계속 겪느니 차라리 그들의 생각을 인위적으로라도 결정해 버리려 한다”는 점을 꼽습니다.
그렇다 보니, “토론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태를 미화”하는데,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공정한 논의가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되고 맙니다. 이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토론을 준비하는 탓에 반대자들은 협소한 공간만을 제공받는 방식”으로, 즉 기울어진 운동장을 마치 공정한 공론장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최근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시위가 비효과적인 이유는 “권력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서 그렇다고 봅니다. 그저 “시위 참여자 자신의 마음과 신념”만이 변화할 뿐이라고도 말합니다.
앞서 체험 이후에야 사고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정교화 가능성 모델 Elaboration likelihood model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직면한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들의 생각을 바꿀지 말지를 고민한다”는 것이죠.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해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친구에게 맞춰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꿀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다만 정치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 수는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될 위험은 상존한다는 것을 경고하기도 합니다.
“누가 차지하든, 인프라는 곧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인프라는 “가능한 행동의 선택지를 구성하고 특정한 방향의 행동을 유도”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가능성만이 아니라 ‘사고 가능성’까지도 형성”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 보니 토론에 앞서 우리가 무엇을 ‘신뢰’할 수 있을지를 선행적으로 형성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참 무섭습니다. 그런데 “인프라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거의 항상 자동적으로, 길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힘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적은 힘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를 악용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182쪽
‘레케리미엔토’가 그랬던 것처럼, 트위터는 ‘공개된 담론’과 ‘광범위한 동의’라는 일종의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머스크와 트럼프 모두를 더 정당하고 더 대중적인 인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특히 그들의 지지자들에게는 효과가 더 강력했다. 트위터는 트럼프와 머스크에게는 그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수많은 지지자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지지자들에게는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민주주의를 위한 가짜 무대를 제공했다.
사회적 위축이란 “주변 탐색을 돕는 뇌 신경망이 사용되지 않으면서 점점 약화하는 증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사회적 고립이 만성적인 경우, 감정 조절 능력과 추론 능력, 그리고 기억력이 약화된다는 거죠. 사회적 고립이 심해지면 인지 판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심지어 편집증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이래로 꾸준히 감소해 왔고, 영국의 정치 참여 수준은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선진국에서 같은 현상이 관찰된다고도 봅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사회적 위축의 증가가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심화해 온 양극화와 외국인 혐오, 극우 사상과 권위주의 확산의 원인이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약삭빠르게 적응에 성공한 것이 복음주의 교회로, “자본주의적 소외에 맞설 수 있는 제도적 지원과 감정적 방어책을 제공”했던 것이 주효했다고도 분석합니다.
대체로 뻔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저자 역시 그런 우려를 무시하진 않습니다.
281쪽
이러한 행동-관계-인프라 접근법에는 몇 가지 약점이 존재한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으레 그렇듯, 방법적인 측면에서 어렵다. 정부를 움직여 인프라를 제공하도록 만들기도 어렵지만, 어떤 인프라는 정부의 꾸준한 도움이 없다면 아예 제대로 기능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순 없습니다. 저자는 너무 추상적일 뿐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최소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는 알 수가 있어서 제자리를 맴도는 일은 없겠지요.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피해 서둘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지점에 충분히 머물며 숙고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란 제안에는 억지로라도 눈길을 주어야 할 듯싶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으로 현명하고 성숙한 태도는, 덜 정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정치적으로 되는 것‘”이란 비장함에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마찬가지로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