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앨리 러셀 혹실드_도둑맞은 자부심

리뷰를 쓰기 힘든 건 독서 경험의 문제다

by 안철

앨리 러셀 혹실드, 『도둑맞은 자부심』, 이종민 옮김, 서울: 어크로스, 2025.

Arlie Russel Hochschild, 『Stolen Pride』, New York City: The New Pr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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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경험 reading experience은 늘 문제입니다.

볼프강 이제르가 「독서과정: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지적한 이래로,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독서 경험이 달라진다는 점은 비평적 지평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다만, 학문적 차원에서 ‘독서 경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합의된 개념을 도출하지 못하고, 각자 학문적 영역에서 여러 개념들을 원용하고 있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됩니다.

따라서 기테 발링 Gitte Balling이 도출한 개념, “독서 경험이란 독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텍스트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지적, 정서적, 미적, 상황적 요소들의 복합체”라는 의미로 접근해 보려 합니다. 그리하여 “독서 경험은 읽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동안 변화하고, 읽은 뒤 회상과 해석 속에서 재구성된다”는 발링의 지적에 유념한다면, 책을 읽고 난 뒤 리뷰를 쓰는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독서 경험은 지속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리뷰 쓰기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책은 쉽고 빠르게 읽었는데요, 리뷰에 무얼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발링의 개념에서 분석해 보자면, '경험 Erlebnis'은 완료했지만 성찰적 체험 Erfahrung을 성형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이 책이 그렇습니다. 노사회학자의 중언부언하는 르포르타주에서 무슨 내용을 어떤 맥락에서 재구축해야 하나 깊게 고민해야 했습니다. 눈에 띄게 탁월한 인지적 분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정서적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탁월한 문장력을 통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인터뷰 내용이 어영부영 이어지는데, 그마저도 큰 의미 없이 반복됐습니다. 그렇다 보니 조금은 지루한 독서 경험을 남기게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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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부심: 상실, 수치 그리고 우파의 발호

이 책이 전달하는 내용은 제목만큼 단순합니다. 힐빌리들이 과거의 영광을 상실했고, 그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게 됐는데, 이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려다 보니 친트럼프 성향의 우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인지 부조화의 해결책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자부심의 역설 Pride Paradox이고요.


가. 상실과 수치

힐빌리 Hillbilly라는 용어는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의 농촌과 산악 지역에 사는 백인들을 일컫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멍청하고 가난한 시골 촌놈’ 정도의 멸칭으로 쓰입니다. 힐빌리들이 사는 지역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때 석탄과 석유를 채굴하던 지역은 국가의 핵심 자산으로 찬사를 받으며 자부심 경제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지만 나중에는 오염된 하천과 깎여나간 산들이 있는 곳으로 인식되며 자부심 경제에서 낮은 위치로 전락”했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석탄 관련 일자리의 상실(절대적 상실), 유산·토지·독창성 등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들의 가치 하락(평가절하), 도시 생활의 가치 상승과 대비되는 시골 생활의 가치 하락(상대적 손실)을 경험했다고도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애팔래치아 사람들은 자부심의 역설에 갇혔다고 봅니다. “근면 성실하게 개인적 책임을 다하는 것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이들 힐빌리들은 “성공하면 자부심, 실패하면 수치심을 느꼈다”는 겁니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the Meirt』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 수렴하는 능력주의 도덕이 강력하게 작용했고, 따라서 일의 존엄성 dignity of work을 상실하게 만들면서 수치심을 자아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상황의 희생자가 된 그들은 부당한 수치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리하여 “수치심을 내면화하거나 외부로 돌리거나 자부심의 역설에 대한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이란 대안

“지역 사회의 자부심에 가해진 뼈아픈 타격”은 “광산, 제재소, 타투숍 등의 폐업에서 비롯”된 경제적 퇴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소멸, 임금 하락, 주민 감소, 마약 유입”도 한몫했습니다. 하지만 “주류 미디어에서는 여성, 흑인, 이미자, 성소수자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목소리”만 높아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애팔래치아 힐빌리들은 “상실감을 넘어 지워지고 대체된다”라고 더욱 심하게 느꼈습니다. 여기에 '백인'이라는 정체성이 부당한 상황을 가속시켰습니다.

255쪽
'백인 특권‘이라는 단어에는 여유롭게 살면서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사람, 즉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들이 겪은 고난, 이를 악물고 세월을 견뎌온 인내, 자신의 공을 들먹이지 않는 품위 같은 것들이 죄다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때 트럼프가 등장합니다. 트럼프는 “끊임없는 반복이라는 특유의 연금술”을 통해, ‘잃어버린 것’을 ‘도둑맞은 것’으로 바꿨습니다. 그러자 안으로 밀려오던 수치심은 차츰 밖으로 향하는 비난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수치심을 안기는 것, 수치를 당하는 것, 피해자가 되는 것, 그리고 반격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네 단계의 의례를 집요하게 활용”해, 우파 성향의 지지자들을 결집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인지부조화를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 방식도 확립합니다. 첫 번째는 “철저한 부정을 통해 폭력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폭스 뉴스 소속이던 터커 칼슨은 그날의 긴 영상을 편집하면서 폭력적인 장면을 모두 삭제했고, 1월 6일 사태에서 “폭력은 전혀 없었다”라고 주장한 것이죠. 두 번째는 “폭력이 발생했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한 짓은 아니다”라고 우기는 겁니다. “안티파 등의 가짜 시위대가 위장해서 MAGA 지지자들에게 수치심을 뒤집어씌우려 한 것”이란 음모론으로 도망칩니다. 세 번째는 “일부가 폭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라고 뭉개는 겁니다. “좋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나쁜 짓도 아니었”다고 우기면 그만인 거죠. 12.3 내란과 1.19 서부지법폭동에서 우리네 극우의 멘탈리티와도 상통합니다.



지지부진했던 이 책의 독서 경험을 끌어올려 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우선 ‘잃어버린 자부심’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준 마이클 샌델의 책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기초해서 미국 예외주의에 이르는 도저到底한 철학적 흐름 안에서 형성된 능력주의가 일의 존엄성에 끼친 해악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이클 모리스의 『집단 본능 Tribal』도 오늘날의 극단적 분열과 갈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독성 부족주의 toxic tribalism라고 언론이 만들어낸 표현을 분석하면서, 편파적 당파성과 차별 그리고 폭력적 극단주의 양상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 줍니다.

릴리 리아라키의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Wronged』는 피해자성을 무기화하는 트럼프와 극우 진영의 전략을 이해할 수 있게끔, ‘포퓰리즘 피해자성의 전략들’과 ‘잔인함의 상징적 화법’을 분석해서 제시합니다.

피터 터친의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역시 현재 미국 사회가 처한 현실과 트럼프를 중심으로 뭉친 극우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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