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홍성윤_그거 사전

'그거'의 이름을 알아보다가 언어와 상징권력을 고민하다

by 안철

홍성윤, 『그거 사전』, 서울: 인플루엔셜, 2024.



1.

jtbc에서 2020년에 방영한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1화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곤포(梱包) 「명사」 거적이나 새끼 따위로 짐을 꾸려 포장함. 또는 그 짐.
사일리지(silage) 「명사」 『농업』 작물을 베어서 저장탑이나 깊은 구덩이에 넣고 젖산을 발효시켜 만든 사료.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으며 영양가가 높아 주로 겨울철의 사료로 쓴다.=엔실리지.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요, 어쩌다 보니 몇 주 뒤에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던 길에 곤포가 쌓여 있는 논을 만났습니다. 그제야, “아, 저거,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라며 머리를 쥐어짜게 됐었죠. 가까스로 드라마 속 대사인 ‘마시멜로’가 떠올라서 ‘논두렁 마시멜로’로 검색해 보고서야 이름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인스타그램에서 다음과 같은 게시물을 접하게 됐습니다.

스탠션 stanchion이라 부르는 이 얇고 낮은 인제책人制柵의 대중적인 모습은 황동색 기둥을 벨벳로프로 연결한 형태일 듯합니다.

최근에는 리트랙터블 스탠션도 나오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더군요. 상품명은 텐서배리어로 잘 알려진 리트랙터블 큐 배리어 retractable queue barrier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역시 드라마 『여우각시별』 1화에 등장하면서 뇌리에 박혔는데요. 그 이름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결국 드라마를 다시 찾아보고 말았네요.



2.

설단 tip of tongue 현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분명 알고 있는 단어인데 갑작스레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혀끝에서 맴돌아, “왜, 그거 있잖아~”라며 조바심을 내는 일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기억 인출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데, 조금 있다 보면 또 툭하고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아주 다른 ‘그거’가 있긴 합니다. “그거 뭐라고 하지? 왜 이렇게 생겨서 이럴 때 쓰는 거 있잖아?”라고 물어보는 것 말입니다. 애초에 그 이름 자체를 알지 못했기에, 막상 그 이름을 불러야 할 때에는 그저 ‘그거’로 부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매일경제의 편집기자 홍성윤이 자사 지면에 「그거 사전」이란 연재물을 싣게 되었나 봅니다. 위의 국립현대미술관 인스타그램 피드 역시 매일경제 「그거 사전2」로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4쪽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물건이지만 이름은 모른다. 그래서 ‘그거’나 ‘이거’로 부르며 답답해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거’는 몰라도 상관없고 알아도 딱히 내세울 곳 없는, 보잘것없는 물건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사물에는 이름과 의미와 쓸모가 있다. 흔하고 대단찮더라도 이름을 알면 달리 보인다.
이 책의 시작은 샴푸 용기의 펌프가 눌리지 않도록 고정해 두는 플라스틱 부품 ‘그거’였다.


3.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와 상징권력』이란 책을 통해,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이나 촘스키의 생성문법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하여 도출된 부르디외의 핵심 사상은 하비투스 habitus(라틴어이므로 하비투스로 읽는 게 맞다는 사람도 있고, 어차피 이를 프랑스어의 지평으로 끌어들였으니 아비투스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래도 아비투스가 대세인 듯합니다.)로 귀결되며, 특히나 언어적 하비투스는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비투스는 “개인이 사회적 공간에서 어떤 행위를 실천할 때 나타나는 규율화된 성향체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비투스는 개인의 구체적 행위를 엄격하게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감각적인 지향성을 부여한다고 봅니다. 그 성격은 크게 네 가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강호신은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는 점진적인 주입 과정을 통하여 특정한 성향을 습득한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형태로 주입된 많은 성향들은 문자 그대로 신체를 가공함으로써 그러한 성향은 제2의 천성, 본성이 된다.
둘째, 이렇게 형성된 개인적 성향들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구조화되어 있다. 동일한 사회적 환경의 출신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동질성을 드러낼 것이다.
셋째, 신체에 각인된 성향들은 그만큼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거나 의식적인 변형이 어렵다는 점에서 개인적 삶의 전 과정에 지속적이다.
넷째, 특정한 환경에서 형성되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성향들은 무수한 형태의 실천적 행위들을 발생시키며, 습득 환경과 다른 사회적 여건에서도 다양한 변형 형태로 작용한다.
- 강호신,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언어이론의 이해」, 프랑스 문화 연구 2014, vol., no.28, pp. 127-164 (38 pages)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언어적 하비투스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언어에 대해 갖는 흥미와 태도에서부터 일정한 발음 방식, 특정한 것들에 관해 발화하는 기질, 문법적으로 맞는 담론을 생성시킬 수 있는 기량, 이 기량을 현실화하는데 적절한 발화 조건에 대한 감각 등”을 통틀어 가리킵니다. 또한, “서로 다른 여러 형태의 시장에서 강화되거나 부인되는 언어 사용 과정을 겪으며, 그 가치와 감각을 내면화” 하는데, “기존의 하비투스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과거에 축적된 하비투스와의 양립가능성을 판단하고 선별적인 재해석 작용을 거치면서 하비투스를 새롭게 한다”라고 합니다.

다만, “사회적 행위자들은 다양한 시장 환경에서 특수한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행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합리적 계산의 결과인 경우는 극히 희귀한 경우”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를 합리적 계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즉 하비투스에 의하여 이미 일정한 지향성이 있는 행위자의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부르디외를 장황하게 인용한 이유는 별 거 없습니다. 왜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고 싶어 하는가를 고민해 봤기 때문입니다.

부르디외적 관점에서 언어생활이란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적 실천이며, 말의 가치는 언어시장에서 결정되는데, 이를 통해 언어능력은 자본으로 기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상징권력은 정당한 언어 la langue légitime를 보이지 않게 정당화하며, 사람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재생산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언어시장에서 교환되는 표준어, 학술어, 관료적 언어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고, 방언이나 속어, 비표준어는 낮은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자본으로 인정받게 되고, 이는 언어자본으로 축적됩니다. 그리하여 언어적 하비투스 안에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고급지다’고 인식되면서 ‘상위 계급의 말하기’로 체화된다는 것이죠. 그까짓 거 대충~ ‘그거’로 부르고 퉁치는 건 무식한 짓이니, 애써 찾아보고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언어적 하비투스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4.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명칭들은 그 기능을 설명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쉬르가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천명한 자의성은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고대 그리스어에서 비롯해 라틴어를 거쳐 중세 프랑스어의 의미망을 경과하는 어원을 갖고 파생됩니다. 프랑스어인 뮈를레를 시작으로 영어로 파생된 랜야드, 애글릿, 컨페티, 펀트, 페룰도 여지없습니다.

근대적 발명품이나 현대적 발명품의 경우는 대체로 합성어가 됩니다. 이때 작동하는 명명 방식은 당연히 그 기능을 드러냅니다. 뚫어뻥의 영어명칭은 plunger는 ‘plunge+er’의 형태소 분할이 가능하며, 힙 플라스크나 페라이트 코어, 볼 체인, 브레드 클립, 소스 보트, 십 스틱, 왈자고리, 인조대입, 레이지 수잔, 메이슨 자, 옥춘당은 단어 단위로 더 명확한 형태소 분석이 가능합니다. 대체로 있는 그대로의 기능 설명이나 구성 재질을 드러내고요. 돈가스망과 같은 경우의 일본어는 매우 노골적입니다. 아부라키리아미의 경우 아부라(油)를 기리(切り)하는 아미(網)라는 말 그 자체입니다. 유절망이라고 한자 독음만을 써놓으면 선뜻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자를 병기한다면 대번에 이해가 됩니다. 19세기 후반 주로 일본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어휘들의 한자어 번역이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처네 「명사」 「2」 어린애를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작은 포대기. ≒횡답.
포대기 「명사」 어린아이의 작은 이불. 덮고 깔거나 어린아이를 업을 때 쓴다. ≒강보.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지천명이 되도록, 포대기를 처네라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되레 “「3」 주로 시골 여자가 나들이를 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 두렁이 비슷하게 만들며 장옷보다 짧고 소매가 없다. =머리처네”의 용례로만 알고 있었을 정도니 말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편찬된 일본의 ‘국어대사전’ 류의 뜻풀이를 그대로 차용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갱신이 더딘 편입니다. 새로운 표제어가 등재되는 것도 느려 터졌습니다.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이 ‘표준어가 없다’와 ‘국립국어원에서 제시하는 적절한 역어가 없다’이긴 합니다.

그렇다 보니, 국가가 국어 정책을 ‘독점’하는 게 맞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는 하는데요, 그러하고 해서 민간에서 잘할 수 있을 리는 없습니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시간과 자본을 갈아가면서 뛰어들 ‘민간’은 존재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는 자금만 지원하고 민간 학회에서 일을 추친하면 될까요? 장담컨데, 배는 산으로 갈 겁니다. ‘정책’ 차원의 문제는 민간에 맡길 수 없고, 그저 자문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이 역시 ‘돈’의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같은 자원이라면 ‘국가기관’인 국립국어원에 더 투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지요. 부르디외의 책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프랑스의 표준어 작업은 18세기말 프랑스혁명 이후로 가열차게 진행되었지만, 표준 프랑스어란 것이 정착될 수 있었던 건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면서 ‘초등교육’을 통해 언어교육을 통일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행정력이 결합되어야 시너지가 날 수 있는 ‘정책’에 대해, 근시안적 단견으로 딴지만 거는 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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