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없는 책을 읽는다는 것

표절과 적절한 인용 표기 사이: 주석 없는 책을 쓴다는 것

by 안철

책을 읽다 보면 주석이 없는 책을 종종 발견합니다.

주로 일본에서 건너온 번역서나 우리나라의 대중서에서 흔하게 발견되는데요, 자료가 되었건 타인의 저작물이 되었건 분명 '인용'해왔을 것이 자명한 문구지만 인용 표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일본의 출판문화에서 주석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고, 그 문화가 바로 수입되는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통'이 확립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주석에 민감해지지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습니다.

주로 문학 작품, 특히 소설에 경도된 독서 경험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어디서' 인용해 온 것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탓도 큽니다. 이렇게 '어디서 인용한 것인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문헌에서 다른 문헌으로 독서가 이어져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 책 하나 딱 읽고 치우게 되면, 어떤 책을 더 읽어봐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생길 틈이 없습니다. 그러면 권말의 참고문헌 목록이나 각주나 미주의 인용 출처 표기도 그저 쓸데없는 지면 낭비가 될 뿐이죠.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하나의 주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 방식으로 독서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을 먼저 읽고 무엇을 더 읽어야 하냐는 '판단'의 준거가 필요해졌습니다. 이때 주석과 참고문헌 목록이 도움이 됩니다. 간혹 번역서 권말에 저자나 옮긴이가 추천 도서 목록을 올릴 때도 있는데요, '그저 한 줄기의 빛'이 됩니다.

그렇다 보니, 주석도 없고 참고문헌도 없는 책을 읽을 때면 살짝 짜증이 납니다.

이 짜증은 단순히 다음 책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떠나서, 이 책이 제대로 인용한 것이 맞을까 그리하여 이 내용이 진짜 맞는 말일까라는 사실성과 진실성의 문제로까지 확장합니다.

인용과 사실성 factuality의 관계는 '정확히 베껴왔는가'의 문제이고, 진실성 truthfulness는 그 내용을 제대로 검증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제대로 베껴오지 않아서 내용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베껴오면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죠. 그런데 이때 인용 출처마저 없다면 사실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일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낑낑거리면서 그 잘못을 찾아냈을 때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각주도 미주도 참고문헌도 없는 책은 '위키피디아' 수준으로 그 신뢰성이 떨어지고 맙니다.

논문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신문기사 중에서도 위키피디아를 인용하는 것들은 그냥 거르는 편입니다. 논문 심사 peer review에서 그 정도도 걸러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논문을 게재한 저널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문가 인터뷰라는 번거로운 전화 한 통화보다는 그냥 위키피디아로 '딸칵' 하고 쓰는 기사도 신뢰할 수가 없는 거죠.

역설적으로 위키피디아는 여러 주석들이 존재합니다. 그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적절한 인용 표기가 늘어나고 있긴 합니다만, 그 인용 출처가 엉터리인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성은 보강되었으나 진실성이 여전히 담보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 위키피디아는 믿을 만한 정보 출처로 접근하기 위한 징검다리 수준으로 활용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적절한 인용 표기가 되지 않는 것은 표절입니다.

신광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2006년 10월 한국학술진흥재단 연구윤리정책위원회 자료에서 “표절이란 적절한 인용이 없이 다른 사람의 논문이나 글에 제시된 생각이나 표현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는 것”라고 말했습니다.

곽동철 청주대학교 명예교수는 "학술논문에서 인용과 표절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인용은 인용부호를 적절히 사용하고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면서 이용하는 것"이지만, 이에 반해 "표절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이용하는 것"이라고 부연합니다. 다만 인용과 표절은 "이론상으로는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지만, 실제 발표된 글에서 이에 대한 구분을 시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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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표절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국어사전의 뜻풀이부터 살펴보죠.

표절 剽竊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 ≒ 표적剽賊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표절 항목


비슷한 표현으로 양절 攘竊이 있는데, "몰래 훔침 또는 다른 사람의 시문(詩文)을 따서 자기 작품인 체하는 것"이라고 뜻풀이 합니다. 영어 plagiarism 또한 라틴어 plágĭum에서 파생하는데, 이 단어 역시 '노예 절도'에서 시작해 표절에 이르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학술적 차원으로 좀 더 가다듬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도 있겠지요.

표절은 적절하게 인용을 하지 않고 원저작물 속에 있는 정보나 아이디어 혹은 어구 등을 따와 자신의 것인 척하는 속임수, 훔치는 행위를 일컫는다. 또한 표절은 단순히 타인을 속이는 비윤리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인재, 「연구윤리 확립을 위한 인용과 표절의 이해」, 『倫理硏究』 66호, 2007, 8쪽.


이인재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크게 세 가지 영역에서의 표절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우선은 연구윤리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자기 표절 및 이중 게재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글의 주제와 맞지 않기도 하거니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표절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법률적인 문제를 가져오는 저작권 위반을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패러디 parody, 패스티시 pastiche, 오마쥬 homage처럼 문학과 예술에서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던 표현 방식이 이제는 법률선에 걸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인용 출처 명기에 대한 대법원 판례까지 확립된 상황이고요

피해자의 저서를 일부 인용하였는데 그 부분이 이 사건 저서를 기준으로 각 장별로 11% 내지 40%가량에 이르는 점, 피고인은 피해자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이 사건 저서의 참고 문헌에 피해자의 저서를 기재하는 한편 그 인용 부분 중 일부에는 각주를 달아 출처를 명시하였으나 인용된 부분의 양, 내용, 전체적인 구성 등에 비추어 그와 같은 정도의 각주 표시 등만으로는 인용된 부분 모두를 다른 부분과 구별해 내기는 어려워 실제로는 피해자의 저서에서 인용하였으면서도 피고인 스스로 창작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상당량 존재하는 점, 이 사건 저서와 피해자의 저서는 같은 주제를 다룬 교과서 또는 기본서로서 시장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점에 비추어 살펴보면 피고인의 위와 같은 인용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인용한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음.
대법원 2014. 10. 27. 선고 2013도8793 판결

가장 애매한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공유하는 영역 public domain, 즉 일반적 수준의 지식 common knowledge을 인용 없이 썼다면 그것은 표절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굳이 이런 것까지 인용했다고 출처 표기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한 발짝씩 물러나다 보면, 어느샌가 주석도 없고 참고문헌도 없는 책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 테면 곽동철 교수의 논문에서 정리한 표절의 양상에서 다음 항목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① 원저자의 아이디어, 논리, 고유한 용어, 데이터, 분석체계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학술논문을 작성하여 게재하는 경우.
② 사용정보의 출처에 대한 부정확한 인용 정보를 제시하는 경우(인용한 자료의 서지사항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키거나 본문에는 인용 정보의 출처를 표시하지만 참고문헌에 기재하지 않는 행위 등 포함).
③ 사용정보의 출처는 제시하지만 인용부호 없이 문구를 원문 그대로 옮기는 경우.
⑥ 원 출처를 인용한 제2차 출처(secondary source)로부터 원 출처에 제시된 글의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제2차 출처를 밝히지 않고 원 출처만 제시하는 경우.
⑦ 논문 심사자가 제시한 비평이나 아이디어에 입각하여 원고(manuscripts)를 수정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명시하지 않는 경우.
⑧ 출처를 인용한 경우라도 본인의 저술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문구와 아이디어를 빌려온 경우.
곽동철, 「학술논문에서 표절의 유형과 올바른 인용 방식에 관한 고찰」, 『문헌정보학』 41권 3호, 한국문헌정보학회, 2007,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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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주석 없는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일까요?

우리 출판문화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합니다.

곽동철 교수는 "해방 이후에 변변한 대학 교재가 없어서 일부 교수들이 일본 미국 등 외국 책을 번역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하였지만, 이에 대해 누구도 어려운 교육환경 속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외국의 선진 학문을 그대로 보급하는 것만으로도 표절이 하나의 ‘성과’로 간주"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에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버티다 보니 표절에 관대한 문화가 조성"되었다고도 부연합니다.

이인재 교수는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관념이 문제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학문적인 겸손을 강조하는 풍토가 "내가 남의 것을 함부로 베끼거나 남이 나의 것을 무단으로도 전재해도 강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들었고, 따라서 표절에 대한 죄의식을 흐리게 했다"고 분석합니다. 덧붙여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잘못된 결과주의, 이에 근거한 학계의 패거리주의가 가져온 ‘침묵의 카르텔’, 그리하여 형성된 지나친 온정주의가 지금의 표절문화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저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블로그에 포스트를 쓸 때, 곽동철 교수의 논문에서 제안하는 방식의 '적절한 인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글이 되게 '짜깁기'를 하다 보면, 적절한 인용 원칙을 유지하기 애매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슬쩍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직접 정리하기 귀찮을 때 생성형 AI를 통해 문단을 구성한 뒤에 그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식도 곧잘 씁니다. '우라까이'만큼 편하니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표절 개념에서 좀 벗어난 새로운 개념의 '표절'이 되어야 할 테지만, 대체로 웹상에서 남의 글을 긁어다가 짜깁기 하는 생성형 AI의 거대언어모델의 특징을 고려해 본다면, 분명 적절한 인용 표기가 부재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오류를 드러내는 표절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 보니, 그저 '다 떨어진 블로그 글, 기껏해야 내 일기장일 뿐'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당연하다는 듯이 시도합니다. 참 비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