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별 책을 다 출판하는 일본의 출판문화
어쩌다가 이런 책이 나 나오나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출판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일본 출판문화만의 독특한 면모라고 분석합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출판 상황 또한 급변하게 됩니다. 그 배경에는 이른바 4대 근대화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① 따라잡고 따라 넘는 근대화 : 학술 번역서의 기관출판 발행, ② 전 국민 교육에 의한 근대화 : 교과서 발행을 위한 대량생산 및 대량판매 체제의 구축, ③ 지식·정보의 분화 및 대중화에 의한 근대화 : 신문·잡지·서적 발행의 활성화, ④ 인쇄기술 혁신에 의한 근대화 : 목판인쇄에서 활판인쇄로의 혁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핵심 특징은 '번역, 요약, 해설'로, 전문 연구자와 일반 독자를 연결하는 중간 장르의 발달했습니다. 즉, 학술서보다 ‘해설서’가 먼저 대중화했던 것이죠. 예를 들어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작들은 엄밀한 학술서라기보다 서구 사상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계몽 텍스트였습니다. 즉, 일본의 출판문화는 처음부터 학술 생산보다 지식의 대중적 전달에 초점을 두고 성장했습니다.
서구 학술 출판은 주로 동료 평가 Peer Review를 통해 검증된 논문에서 확장되며, 대학 출판부를 중심으로 학술서적을 출판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그러고 나서 대중서가 2차적 출판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교수의 대중서 집필이 커리어에 불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문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펴내는 일도 흔합니다. 이런 문화는 신서 출간으로 이어집니다.
일본 출판문화의 결정적 특징은 신서新書 시리즈입니다. 세계 주요 국가에는 오랜 전통의 문고가 있습니다. 일본 이와나미 문고(1927), 영국 펭귄문고(1935), 프랑스 크세즈(1941), 독일 레클람(1867) 등이죠. 우리나라도 1970년대 중후반 을유문고, 서문문고, 박영문고, 삼중당문고 등 많은 문고들이 경쟁하는 문고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문학 텍스트 중심의 문고본에서 인문학으로 넘어간 기획이 바로 신서로, 일본의 3대 신서로 이와나미신쇼 岩波新書, 주코신쇼 中公新書, 고단샤겐다이 신쇼 講談社現代新書가 꼽힙니다. 200쪽 내외, 저렴한 가격, 학술 기반이지만 대중 대상, 교수들이 직접 집필이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앞서 살펴본 서구 대학출판부의 엄격한 학술 모노그래프 Scholarly Monograph 모델에 따른 “논문→전문서→대중서”로의 이행과는 구조적으로 다릅니다. “연구자→교양 독자”로 곧바로 연결되는 통로를 제도화했습니다.
일본은 인구 대비 서점 밀도가 높았고 전통적으로 중산층 교양 소비층이 두텁습니다. 따라서 통근 시간을 이용한 독서 문화가 정착됐고, 이에 맞춰 작은 판형의 휴대용 책 선호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 문고본과 신서 문화의 정착은 다른 맥락에서도 설명될 수 있지만, 이런 문화와의 연관성도 갖추게 됩니다. 신서 구매 관행은 “깊지만 어렵지 않은 책”을 안정적으로 소비합니다.
또한 20세기 일본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잡지 강국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발달한 것은 짧고 흥미롭게 핵심을 압축하는 편집 기술입니다. 이는 학술 논문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읽히도록 재가공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한 출판 생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도해図解'를 통해, 지식을 권위로 유지하기보다 콘텐츠로 전환하는 문화적 습관을 형성했습니다.
종종 '흥미 위주의 편집'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난해한 이론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장치이자, 독자층 확장을 위한 상업적 전략으로 작용하면서, 학문을 문화 산업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단순화, 선정적 제목, 맥락 생략이라는 부작용도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문제점이 보이죠.
The notion that Japan is a “nation of readers” has long been supported by Japanese cultural critics and, unsurprisingly, publishing associations. Indeed, contemporary Japan represents a wonderland of books, where reading remains one of the most popular pastimes.
Best sellers and works of scholarship alike are available in pocketbook (bunkobon) format for easy reading on the daily train commute. One of the largest retailers to enjoy enormous and consistent growth throughout Japan’s economic turmoil of the past two decades is Book Off, a big box chain of used bookstores. Yet this state of affairs represents in many respects an outgrowth of the publishing explosion and vibrant print culture of the early modern era, while printing itself dates back almost as far as the written language. All of this makes Japan fertile ground for the study of book history and print culture, by Japanese and non-Japanese scholars alike.
- Andrew T. Kamei-Dyche, "The History of Books and Print Culture in Japan: The State of the Discipline", Book History, Vol. 14 (2011), p.270.
출판사 사람과나무사이는 세게사란 말이 제목에 '묻으면' 무지성으로 "세계사를 바꾼 00가지 00"이란 시리즈로 번역서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이 책, 『10の「感染症」からよむ世界史』도 그렇지만, 고단샤겐다이신쇼인 佐藤 健太郎의 『世界史を変えた薬』, 주코신서인 臼井隆一郎의 『コーヒーが廻り世界史が廻る』외에도 稲垣栄洋의 『世界史を大きく動かした植物』, 越智敏之의 『魚で始まる世界史』, 大宮 理의 『ケミストリー世界史 その時、化学が時代を変えた!』와 『ケミストリー現代史 その時、化学が世界を一変させた!』, 村上 満의 『ビール世界史紀行 ビール通のための15章』처럼 말이죠.
마케팅 차원에서는 정말 좋은 기획입니다. 직관적이면서도 하나의 시리즈물 같아 보여서 좋습니다. 예일대학교 출판부의 "A Little History ~" 시리즈가 떠오르니 말입니다.
사람과나무사이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00가지 심리실험"이란 제목으로 여러 책들을 번역해서 출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심리학자들이 신문 등에 연재했던 칼럼들을 모은 책들이 제법 많은데요, 이런 책들을 또 같은 방식으로 출간한 거죠. 이 책들도 박이부정하나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짜증이 솟구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원제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어떤 책들도 세계사를 바꾼 무언가를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사의 한 단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다루기 때문에 분명 내용은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원제만 떠올린다면 저항감 없이 읽히는 내용인데도, 번역서 제목을 무시할 수가 없다 보니 집중력을 잃고 덜컹거리게 됩니다. “제발 좀 제목 장난질 좀 치지 말라고!”라며 짜증을 내게 됩니다.
번역서 출판사의 장난질은 제목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목차까지 흔들어대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을 흐트러뜨리는 데도 과감함을 드러냅니다.
원서의 목차는 <Part1 人類と感染症>으로 시작합니다. 번역서에서는 권말에 11번째 챕터로 다루고 있는데요, “저자는 왜 병신같이 이런 총론을 앞에 다루지 않았지?”라며 욕을 뱉었더랬죠. 그러다가 뭔가 싸한 느낌이 오더군요. 역시나 출판사의 장난질이었던 겁니다. 보통 책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습니다. 각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총론을 다루는 상식을 갖추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원서에서는 총론부터 다루고, <Part2 人類史に影響を与えた10の感染症>이란 목차로 페스트 ペスト, 인플루엔자 インフルエンザ, 콜레라 コレラ, 말라리아 マラリア, 이질 赤痢, 결핵 結核, 천연두 天然痘, 황열병 黄熱, 티푸스 チフス, 매독 梅毒을 차례로 다룹니다.
이 책의 서문의 첫 시작은 엉터리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8쪽
페스트는 유럽 근대화의 인큐베이터였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으나 사실이다. 실제로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가 아니었다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인한 지식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과장은 언제나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런 식으로 복잡한 역사를 단선적 신화로 환원하는 서사적 과장은 분명 선정적이지만, 역사적 인과관계를 다루는 과정에서는 단일 원인의 오류 Fallacy of the single cause에 빠지게 됩니다. 책 내용의 사실성과 진실성에 치명적이죠.
일단 인큐베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살펴보면, 메타포로서의 적합한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가함으로써 성장을 촉진시키는 경우가 없진 않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바람직한 어려움 Desirable Difficulties이라 부르는 시련도 있죠. 하지만 페스트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재앙이었습니다. 재장이 인큐베이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과론적으로 페스트에서 인류가 살아남긴 했다지만, 거의 절멸 수준에 이른 지역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보면, "첫판부터 장난질을 치면 고광렬이처럼 빨래질을 당할 수 있다"며 혼자 짜증을 내게 됩니다.
"페스트가 아니었다면 금속활자 발명으로 인한 지식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억측 또한 짜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역사란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바뀌게 됩니다. 유럽의 근대화는 중세 말 상업혁명과 도시의 성장, 동로마제국의 멸망이 이끈 이탈리아 르네상스, 교황권과 제후권의 권력 재편, 흑색화약을 통한 군사 혁명, 대항해 시대, 종교개혁, 국가 재정 체계의 발전 등을 꼽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학의 설립 등 서적 수요가 증가했고,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필사본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양피지보다 저렴할 뿐만 아니라 생산량도 많은 종이의 공급량이 많아지기도 했지요. 지식 혁명이 태동했기 때문에 도서 유통 시장이 발전했고, 그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시도된 것이 활판인쇄였습니다. 다만 구텐베르크는 실패한 사업자였습니다. 제지산업은 비교적 일찍 상업화에 성공하지만, 인쇄산업은 구텐베르크 사후 1세기 정도의 지연이 이루어집니다. 시장 수요가 견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진술은 개소리가 되고 말죠.
11쪽
14세기 페스트 팬데믹의 가장 큰 수혜자를 딱 한 명 꼽으라면? 나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를 꼽고 싶다. 페스트 팬데믹을 계기로 출판문화가 크게 융성했으며, 그 중심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상황은 다음 네 권의 책이 꽤나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스페인 독감이 오히려 전쟁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가져왔다”는 개소리도 짜증을 불러일으킵니다.
92쪽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지 않았더라면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어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페인 독감이라는 감염병이 전쟁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가져오며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인플루엔자 챕터인 91쪽에서 한 차례, 이질 챕터인 199쪽에서 또 한 차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다룹니다. “비좁고 습도가 높은 불결한 참호 속 환경은 이질과 발진티푸스, 콜레라, 스페인 독감 등이 제집 안방처럼 활개를 치기 안성맞춤인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고통은 엄청 심했습니다. 비단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에서만 이런 환경이 조성된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모든 전쟁터에서 이질과 티푸스는 고정값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는 인간이 밀집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모든 감염에 취약해지게 됩니다. 스페인독감이 없었다고 해도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화하기 어려웠던 전쟁입니다. 군사학자 윌리엄슨 머리는 “1918년이 되자 독일은 기아에 가까운 상황에 직면했고, 이는 그해 독일 패망의 원인이 됐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럽의 식량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농경지를 통해 공급됐습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의 개발 덕분에 생산량이 증가시켜 준 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독일은 이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해상통로가 봉쇄당했습니다. 연이은 흉작에 이어 국내 경제는 붕괴됐고, 수송 인프라마저도 작살났기 때문에 1917년에 이르면 전쟁을 계속 이어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