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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짐 Aug 30. 2023

오늘의 여름날

견디기 힘든 순간 찾아온 풀잎에게

너 흔적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눈뜨자마자 찻물을 끓이고 마음 편한 연잎차를 우렸어. 너가 준 건데 기억할지 모르겠네. 이제야 개봉했거든. 최근 들어서야 겨우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시작했고 매일 아침 따뜻한 차를 마시는 습관을 되살린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찻잔은 매일 달라. 오늘은 성심당 밀크글라스 컵을 꺼냈다. 자주 손 가는 컵이라서 로고랑 강아지인지 돼지인지 아무튼 동물 모양은 거의 벗겨졌어. 지금 이 편지는 너가 준 생각의 여름 음반을 들으며 쓰고 있지. 작년 여름 같이 스탠다드 교토에 갔던 일이 생생히 떠오른다. 때마침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홍갑 노래가 나와. 너가 먼저 출근하고 난 뒤 혼자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너가 새벽에 택시 타고 가져다준) 이 노래를 들었었거든. 참 좋았어 그때.

그때도 비가 왔었네. 우중여행이 너와 나의 연결고리인가. 좋다.

오전에 너랑 하동여행 계획을 조금씩 구체화하고 집안일도 하고 밥도 챙겨먹으면서 벌써 오후가 됐어. 그사이 차색이 연해지고 식어버려서 새 티백을 우려온 참이야.

내 일상 어디에나 너가 넘쳐. 돈으로는 살 수 없고 구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 너가 나를 생각해준 마음이.

그걸 잘 몰랐어. 내가 마음의 여유 없이 살았다는 것조차 최근에 깨달았어. 힘들고 우울한 마음은 내 맘 깊은 곳에 무거운 걸로 꾹 눌러 놓고, 납작하게 문드러진 것을 모른 척했어. 모른 척하다보니 잊어버렸고 잊어버린 줄 알고 뭐 때문인지도 망각해버렸어. 요새 신경정신과 약을 먹어. 2주가 좀 넘었다. 어제 병원에 간다고 했잖아. 진료가 있는 날이었어. 병원에 가고 약을 먹으며 수면의 질이 높아진 건 확실히 도움 받고 있는 부분이지만 마음 상태와 컨디션이 좋아진 건 단순 약 때문은 아닐 거야. 나를 돌보고 챙기고 꺼내기 시작했거든. 그렇게 하니까 마음이 정말 편해졌어. 오히려 다른 사람을 더 챙길 힘이 생기고. 너한테도 내 이야길 많이 하고 싶어.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감정을 드러내고 싶고 위로를 받고 싶어. 너가 힘들 때,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어. 서로 많은 것을 털어놓고 위로의 포옹을 해주자. 안아주는 마음, 안기는 마음이 요즘은 너무 눈물겹고 감사해. 나는 내가 잘 들어주고 잘 기다리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너한테 유독 그러지 못했어. 니 속도, 니 방식, 니 마음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헤아려주지 못한 지난 날을 반성해. 미안해 풀잎아. 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게 된 내가 조금은 대견해. 곧 운동 갈 시간이다. 돌아와서 저녁 먹고 반신욕을 한 다음에 '당신의 밤과 음악 40주년' 음반을 들을 거야. 니 생각 하면서. 그 음반 타이틀이 뭔지 아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가 나를 기다려준 것 같아서 니 목소리가 들려. 고마워.


돈으로도 살 수 없고 구하기 어려운 귀한 것을 ㅁㅌㅉ에게

2023년 8월 10일 총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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