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적지 못한 좋은 일이 분명 또 있을 것이다
어제는 안과에 다녀왔다. 아침 설거지를 하려고 주방세제를 짰는데 오른쪽 눈에 들어가버렸다. 물총 쏘듯 정통으로 맞아버려서 왁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소파에서 자던 영감이 깜짝 놀라 같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뵈는 게 없는지라 나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거품이 이는 눈을 수돗물로 몇 번 헹군 뒤 곧장 병원에 갔다. 약을 먹고, 약을 넣고, 약을 바르고 한숨 자니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또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섰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수세미를 오므려 주방세제를 짰다. 한창 설거지를 하는 중에 침실에서 영감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영감을 살피러 갔다. 영감은 괜찮다고 했지만 싱크대로 돌아가자마자 물 한 잔을 떠놓았다. 그러고 바로 아끼는 컵 하나를 깼다.
어제오늘 설거지를 하다 말고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일어났지만 안 좋은 일 따위 다 덮을 만큼 좋은 일이 많았다. 눈에 퐁퐁이 들어갔어도 나는 멀쩡하고, 컵이 깨져도 아깝지 않았다. 마냥 아끼지 않고 실컷 사용했다. 실금을 그어놓고 톡 두들겨 깨진 것처럼 유리조각도 깨끗해서 다치지도 않았다.
엄마 시에 정성스러운 해설을 붙여주신 교수님의 메일이 도착했다. 저 멀리 선명한 산과 노란 구름에 걸친 무지개를 봤다. 그것도 쌍무지개. 아름답다, 영감과 꼭 끌어안고 여린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내 감사한 마음이 솟구쳤다. 꼭두새벽부터 목 빠지게 기다렸던 영감 의자가 밤늦게 도착했다. 무빙 6화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고 치킨도 먹었다. 비가 그쳐 옥상의 의자를 다시 펼쳤다. 엘포인트와 적립금을 합쳐 두 권이나 공짜로 책을 샀다. 생리도 한다. 우울증 약을 빼보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 흠결 하나 없는 새의 날개를 주웠다. 운전을 해서 출판사에 다녀왔다. 이틀 연속 무지개를 봤다. 미처 적지 못한 좋은 일이 분명 또 있을 것이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라면 국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린 적 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켁 소리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을 뜨러 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하찮고 멋없어 나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었다.
오래 전에 헤어진 사이지만, 그 마음이 소중했구나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그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했구나. 그래서 헤어졌겠지만.
내 삶이 충만해서, 조금 오만하게도, 서로를 살피는 마음이 살뜰한, 그런 사랑을 하고 있길 쓸데없이 바라본다. 나는 꽤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