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남긴 종소리

우리는 빈자리에 무엇을 남기고 떠나나

by 행성인 D


정적과 어둠이 내 세상의 전부이며 결국은 맞이할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과하게 밝은 당신이 특별해진 건, 바람이 불면 종이 울리듯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성격은 정반대였고 시선은 자석처럼 자주 맞았다. 미련할 정도로 태양을 바라보며 말라가는 나에게 당신은 몰아치는 파도처럼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파도에 한 번 휩쓸리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말씀이다. 찬란한 파도에 휩쓸린 나를 구해준 어머니는 어쩌면 이런 내 미래를 알고 계셨던 것일까? 휩쓸려가듯 나를 이끄는 당신의 손짓에 나는 뒤늦게 생각했다. ‘아, 빠져나오긴 이미 늦었다‘고. 멍하니 당신을 보며 내 앞날을 걱정할 때 귀신같이 내 생각을 알아챈 당신이 웃었다. 언젠가 그 바다처럼 찬란하게.


세상에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당신은 과연 그 성격답게 화려한 웃음으로 끝을 고했다. 내가 생각한 끝은 고요함 속에 홀로 치러지는 은밀한 의식과 같았다. 이 얘기를 들은 당신은 얇은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아가며 웃었다. 그때 당신은 분명 내 의견을 존중했다. 터지는 웃음과는 별개로. 그렇게 당신은 가시지 않는 여운 속에 나만 홀로 남겨두고 장막을 걷어 훌쩍 퇴장했다. 내가 당신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담담하게 저 멀리 걸어 나갔다. 나를 관객으로 남겨두고 먼 길 떠나는 당신을 보며 '보기 좋게 당했다'라는 생각이 또 뒤늦게 들었지만, 이제와 깨달으면 뭐 해. 이미 당신은 그에 걸맞은 화려한 퇴장을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신은 파도와 다른 점도 있었다. 파도는 언제든 내게 되돌아오지만, 내 발끝에서 물러난 당신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떠오를 땐 나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언젠가 내 몸을 스쳤던 파도의 물결을 상상하며.


마치 손을 흔들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당신은, 눈꺼풀의 작은 바람으로도 온통 내 세상을 흔들어 원래 세계로 되돌려놓았다. 익숙한 정적과 어둠 속에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서있다가 보면 다리가 아프니 좀 앉아있고 배가 고프면 뭐 좀 먹다가 잠이 오면 누워서 잠을 잤다. 이게 원래 내 삶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나는 삶의 안에서 지속되는 생의 의지에 불과했다. 그런 내게 의미를 준 당신이 삶의 의지와 더불어 나를 이끄는 욕망이 되었다. 그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진실로 아주 거센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을 만큼. 물속에 금방 꺼질 불꽃이라도 기꺼이 파도에 내 몸을 부수어 보여주고 싶을 만큼. 이 간질간질한 말을 입으로 전하지 못해서 글로 적어낸 적이 있다. 당신은 파도와 같다고. 내 투박한 말에도 숨은 의미를 찾아낸 파도는 나를 감싸며 말했다. '내가 파도라면 당신은 나를 품은 육지야.' 건조한 땅에 단비를 뿌리듯 말하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을 말하자 그늘 속 당신이 익숙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나를 바라봐도 어쩔 수 없다. 그러게 누가 먼저 가랬나. 자꾸 힘없이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그늘 속 당신에게 말을 전하고 싶었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내 몸의 무게를 느껴가기 시작했다. 그때 당신은 이렇게 무거운 몸으로 잘도 내 손을 잡아주었구나. 두 손을 힘없이 침대 위에 늘여놓고 멍하니 당신을 눈으로 좇았다. 문틀에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댄 당신은 내 세상 속에 융화된 듯 답지 않게 아주 조용했다. 내 마른 입술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무겁게 닫혔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오랜만에 시끄러운 당신을 느끼고 싶어.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해도 무심한 당신은 입도 벙끗 안 한다. 좋아, 아무리 내 환상이라도 말로 해야 알아듣는다는 거지? 내 소리 없는 불만이 느껴진 것인지 살포시 당신이 웃는다. 저 미소에 마주 보며 웃어주고 싶었다. 결국 감기는 무거운 눈꺼풀이 아니었다면. 거 봐. 내 끝은 내가 예상한 대로야. 아주 고요하고 어둡지. 이제 와서 말하는데, 그때 당신은 내 말에 웃으면 안 됐어. 좀 더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듣고 날 혼자 이 세상에 두지 않게 오래 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고. 무기력해지는 몸에 반항하듯 머릿속은 주절주절 말로 가득 찼다.



―.



그때 맑은 종소리가 내 모든 상념을 지워내고 홀로 존재했다.



―.



그래, 맞아. 저건 웃음소리가 종소리 같다는 내 말에 어느 날 당신이 손에 들고 온 작은 종이었다. 앞으로 이 종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떠올리라던 짓궂은 얼굴이 떠오른다.


당신도 어머니처럼 내 외로운 미래를 봤어?



―.



'나는 당신에게 무얼 남길 수 있어?' 한 번씩 뜬금없는 내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고민하는 당신이 젓가락질을 느리게 했다. 입에 있는 것들을 씹어내며 당신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그 짧은 시간에도 당신은 생기 넘치는 표정들을 지어냈고 아무리 봐도 나는 그 안에 내 숨조차 채울 자리가 없어 보였다. 조급함에 질문을 던져놓고 막상 질문을 던진 후에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 속도 모르고 작은 허밍까지 부른 당신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마치 중대한 사실을 말하려는 듯 물을 한 모금 삼킨 당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내 질문의 뜻을 완벽히 파악한 답변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이해와 배려.' 나는 눈을 깜박이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억울한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당신은 원래 이해와 배려가 있어.' 맥 빠진 호흡에도 종소리가 울렸다. 환하게. '난 당신에게 많은 걸 배웠어. 저것도 마찬가지야.' 나를 달래는 목소리에 푹 빠져들다가 내 뒤쪽을 가리키는 긴 손가락에 뒤를 돌아보았다.


오래된 기억을 따라가듯 나는 마지막으로 앞을 보려 안간힘을 썼다. 노력 끝에, 닫힌 창문 앞에 걸려 있는 작은 종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 저 종. 파도가 자신의 빈자리에 두고 간 작은 종이다. 그 종 앞에 서 있는 당신은 짧은 손톱을 가진 손가락으로 종을 톡, 건드렸다.



―.



아,

어쩐지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무거운 눈을 감았다. 이제야 당신이 답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맑은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 할 나를 위해 종을 달아 놓은 당신의 이해와 배려. 땅 속 깊이 이해하는 나와 다르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육지를 쓸어내리며 내게 알려준 사랑. 육지에 다가오고자 파도가 쳤노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믿게 하기 위해 육지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쳤다.


오랜 깨달음 끝에 속이 울렁인다.


그랬나?

당신이란 파도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치고 있었나?


사람은 홀로 간다는 내 말을 보기 좋게 무시한 종소리가 방안에 맑게 울려 퍼졌다. 여운마저 아름다운 당신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