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운명에 의해 잉태되고, 숙명이 조용히 눈을 떴다.
여기 한 용사가 있다.
사소한 행동들이 전부 예상이 가고 의지가 없나 싶을 정도로 맹목적인 운명의 길을 걷는 사람.
우리에게 거대한 악이 있다.
사람에게 태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점점 몸집을 크게 부풀리는 악.
용사는 운명에 의해 잉태되고, 숙명이 조용히 눈을 떴다. 어린 용사의 첫울음은 어땠을까? 다른 아이와 다르게 용맹하게 울었나, 아니면 침잠한 마음처럼 파도가 조용했을까. 우린 어린 용사의 첫울음을 모른다. 만약 용사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사사로운 것들이 아닌, 앞으로 용사가 이루어낼 마땅한 평화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의 환호가, 그들 앞에 선 운명이 용사를 그렇게 키웠다.
용사의 마지막 칼춤이 악이라 불리는 한 존재를 찢어내고 그것은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였다. 악의 퇴장에 때맞춰 개어지는 하늘에서 햇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에는 선명한 무지개가 떠있었다. 빛은 승리다. 무지개는 순수함이다. 선한 자들의 승리였다. 용사와 함께한 동료들은 승리의 기쁨에 취하기보다 다리에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악을 죽인 그들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고요한 용사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깊은 허무함이 이성적인 머리와 싸우기 시작한다. 용사는 허튼 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악이라 불리는 존재를 없애기 직전에 그것은 용사의 마음에 돌을 던졌다.
‘이것을 끝으로 알지 마라. 나는 같은 인간의 탈을 쓰고 찾아오겠다.’
너는 끊임없이 나를 베어내야 할 것이다.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끝을 낸 용사는 그 말을 반복해서 씹었다. 소리 없는 파도라 불리는 용사였다. 제 아무리 저주의 말을 던진다고 해도 몰아치는 파도에는 균열을 낼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 설계한 용사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악이라 불리는 존재가 던진 작은 돌이 퐁당 소리를 내며 바다에 가라앉는가.
과연 이것으로 악을 온전히 물리쳤나?
우리에게 해가 되는 존재를 없애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내게 해가 되는 당신이라면 없애도 되는가?
평생 실체 없는 악을 없애며 사는 용사는 정당한가?
언제든 인간의, 우리의, 너의, 나의 적은 계속 생겨날 거다. 그때마다 하나씩 없애버리면 이 세상에 누가 남을 수 있을까. 그 땅엔 용사조차 설 곳이 없다. 언제나 용사는 악을 없애기 위한 운명 안에서만 존재하니까.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악은 용사 자신이 될 터였다.
태어난 이래에 제 존재에 대한 의심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던 용사는 혼란스러웠다. 용사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닦아낸 것은 붉은 피였다. 악의 살갗을 도려냈을 때 용사의 얼굴과 갑옷에 피가 튀었다. 이건 악의 피다. 물리친 악 또한 붉은 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와 같은 붉은 피. 악은 우리와 같다.
용사 일행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의 왕 앞에 섰다. 악이 존재했던 곳에 보물이 많으니 나라는 더욱 부강 해질 것이다.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들에게 엄청난 명예와 재물을 안겨주리라 선언했다. 사람들은 환호한다. 왕이 무섭게 경고한 악이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일의 절차상 잠깐 찾아온 평화가 영원할 것처럼 서로를 껴안았다. 우리의 적은 그 힘을 알 수 없기에 두려운 무언가였고 그것은 곧 악이었고 악은 생명체라 용사의 칼끝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개인의 적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것은 곧 자신에겐 악이고, 악은 생명체라 언제든 사라지고 또다시 생길 수 있었다. 용사는 그걸 깨달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건 운명이다. 작은 입 하나 연다고 거대한 운명의 틀을 바꿀 순 없다. 그건 사람들이, 또 그들 앞에 선 운명이 용사에게 평생 알려주었던 것이다.
용사는 왕이 내려주는 것들을 받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한 것이니 대가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용사는 남들이 기피하고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한다. 사람들은 그런 용사를 우러러보고 대단하다며 환호했다. '역시 우리의 용사님은 달라!' 그들은 기뻐하며 옆 사람을 껴안는다. 화려한 잔치가 벌어질 예정이었고 용사는 그간의 여독을 풀기 위해 잠시 물러났다.
용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용사는 원래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이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반성과 후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본다는 것이다. 용사는 철저하게 현재를 사는 존재다.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면 죽음은 좀 더 가깝게 느껴지고 그 죽음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는 순간 죽음은 멀되, 그것의 힘은 강해져 곧 모든 것이 두려워진다. 마치 용사가 베어낸 존재처럼.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환호하는 사람들의 것이지 용사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용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용사는 자신의 낡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작은 창문을 통해 주홍색 노을빛이 길게 드리운다. 누구도 용사의 노을을 모른다. 용사는 빛과 어둠 속에만 존재하며 생각이 많아지는 노을 아래에는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존재하는 오두막 안에서 용사는 손등을 바라보았다. 악의 피가 묻었던 손등 위로 노을빛이 떨어지고 있다. 산란하는 빛은 용사의 손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어둠에 점차 스러지는 노을이 운명을 피해 조심스럽게 용사에게 말한다.
‘그러나 용사는 존재한다.’
한참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던 용사는 낡은 오두막 문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울고 춤추며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그들이, 악이 사라짐과 동시에 용사에게 등을 돌린 채 웃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그들 앞에 존재하던 운명이 보이지 않았다. 용사는 처음으로 세상에 물었다.
"내 다음 운명은 무엇이지?"
운명을 따를 때는 진흙탕 웅덩이에도 거침없이 내딛던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낡은 오두막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나? 경직된 용사의 턱끝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고 허공에 멍울져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계속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태어나면서 침잠했던 욕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용사는 망설인다. 운명이 미리 개척해 둔 길이 아닌 맨땅을 밟는 건 처음이었다. 두려움. 용사는 존재하면서 처음으로 두려웠다. 거대한 악 앞에서도 떨지 않았던 용사는 운명이 사라지자 다른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용사에게 본래 삶은 두려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운명은 그런 기회를 여태 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용사는 낡은 오두막에서 운명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문틀을 붙잡던 용사는 발을 뒤로 뺐다. 그 순간 툭―, 등을 미는 간단한 손짓에 용사는 너무 어이없게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해진 신발 옆으로 작은 물방울이 톡, 떨어진다.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던 작은 물방울은 금방 불어나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명을 거스른 용사의 발걸음에 하늘이 식은땀을 흘렸다. 머리와 갑옷이 다 젖을 정도로 빗속에서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던 용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용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용사는 존재한다.
용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 때문에 눅눅하고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두막 내부에 무언가가 서 있다. 운명을 잃은 용사의 등을 떠민 것. 아주 오랜 시간 뒤에 서서 용사가 뒤를 돌아보기를 기다렸던 것.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철퍽, 철퍽. 사람들이 급하게 밟아대는 진흙 소리가. 모든 소리가 용사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래, 파도가 조용할 리 없지.
순식간에 눈앞의 것이 사라져 용사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용사의 뒤에 존재했다.
"가."
숙명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