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시선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세상에 길을 잃어보는 것뿐이다.

by 행성인 D




나는 떠났다.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웠는지, 홀가분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들은 과거와 아주 조금이라도 다를 것이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환경은 변할 것이고 불어오는 바람과, 조금 습한 온도 그리고 내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알던 모든 것이 아닐 테다.


알을 깨고 나왔는데 세상은 또 거대한 알이다. 이 알 너머엔 어떤 거대한 알이, 또 그만큼 얼마나 감싸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하루만 보는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알을 깨겠다는 거창한 마음 따윈 애초에 갖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깰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깨어가며 살아가길 원했다.


기계처럼 움직이던 다리가 느려지고 어깨에 메고 있는 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졌다. 땀이 흐르고 갈증은 미지근한 물로 해결했다. 그 일을 반복하니 점점 해는 지고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앞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이 앞으로 오래 걸어갈 수 있는 내 노하우다. 나는 허리를 펴고 세상 너머를 보듯 시야를 멀리 던졌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저기 먼 곳에 불빛 하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불빛에 점을 찍어두고 바람이 준 작은 여유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묘한 빛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어찌나 저렇게 아름다운 색 조합을 알아내었는지. 자연의 한 부분인 나는 당연하게 마음을 하늘에 뺏기었다. 넓은 들판에 멈춰 서서 잠시 동안 하늘이 좀 더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는 빛이 더 잘 보였으니까.


내 한 편의 어두운 마음을 빼앗은 밤하늘은 깊이를 더 해 가며 점점 진해졌다. 그림자 없는 밤이 되면 땅과 하늘은 서로를 반사한다. 내 머리 위 떠있는 별은 나를 반사한 것이다. 인사하듯 손을 흔들면 별빛이 일렁인다. 밤하늘에 우리의 별이 뜰 때 바람이 다시 출발하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신호탄이 터졌다. 나는 여행자답게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아까 점을 찍어둔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참으로 광활한 세상이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고 배우고 또 배워도 모르겠다. 거대한 세상 속 작은 내가 그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세상에 길을 잃어보는 것뿐이다. 내일의 목적지도 모른 채 새로운 숨을 들이마시고 복잡함을 내뱉으며 난 계속 앞으로 걸었다. 내일은 몰라도 눈앞에 불빛은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