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정도 본다 하는 사람이라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당연히 알 법한 배우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비상식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상(賞)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한참 전에 받았어야 했을 것 같다만, 일단 그도 아카데미의 오스카를 손에 넣었다. 바로 이 영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를 통해서.
혹자는 이 영화가 오스카를 따낼 정도로 위대한 영화가 아니라고 한다. 박진감도 없는 평범한 영화인데 배우가 디카프리오라서 오스카를 받은 거란다. 글쎄, 내가 볼 때에는 그 사람은 「레버넌트」라는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다소 강하게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 그렇다! 이건 아들의 복수를 하는 아버지의 서부 액션 활극이 아니다. 만일 정말로 「레버넌트」를 <테이큰> 시리즈와 같다 보고 있었다면,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여로(旅路), 목적지가 아닌 사람에 시선을 두다.
<삼포 가는 길>이라는 소설이 있다. 동명의 영화로도 상영된 이 작품은 여로형 장르의 전형이라고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다. 여로형 장르의 특징이 무엇일까? 가는 여정을 담는다는 것이다. '간다'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출발 지점, 도착 지점, 그 사이의 경로, 그리고 가는 행위를 하는 '사람.' 뭐, 장르에 따라 도깨비나 동물이나 벌레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말대로라면 여로형 장르는 '어떤 사람이(혹은 존재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를 가는 과정을 담는 장르'인가? 이 설명은 '여로'라는 사전적 의미를 잘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르'라는 말이 붙었다는 점을 유의해주길 바란다. 이 말은 창작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다시 말해 창작자가 있다는 말이다. 창작자가 단순히 경로 안내를 하려고 '삼포'라는 허구의 공간까지 만들어가며 소설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바가 숨겨져 있다.
이는 주인공을 따라가며 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새로운 공간을 지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사건, '해프닝'이 발생한다. 내면적으로든 외면적으로든 나타난 해프닝은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하게 만든다. 여정의 끝에 선 주인공은 시작선에 서있던 존재와 다른 존재가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렇다. 이 변화의 장이 되는 길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바로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파멸을 향하는 여정, 그 새의 수많은 감성
다시, 「레버넌트」로 돌아오자. 이 영화의 장르는 사실 액션 영화 보단 여로형 영화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부제를 잘못 붙였다고 생각한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고 하면 뭔가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악에 받쳐서 모든 힘을 다해서 적을 쳐부수려 하는 강력한 모습을 기대하게 만든다. 차라리 '죽음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면 오해가 덜 했을 것이다. 예고편 영상도 이 오해를 더욱 부추긴다. 예고편에서는 톰 하디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도끼를 들고 싸우는 처절한 몸싸움, 말을 타고 인디언에게서 도망치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장면, 곰에게 습격받는 장면 등이 열거된다. 티저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이해는 된다.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보여줘야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영화를 보러 티켓을 살 테니. 하지만, 그만큼 상상한 영화와 실제 내용 사이의 갭(Gap)이 커져버릴 뿐이다.
「레버넌트」의 감독이 보여주려 한 것은 핏츠 제럴드(톰 하디)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그 복수를 하는 길이다. 이 길은 너무나도 험난하다. 곰에게 다쳐 성치 않은 몸으로, 눈을 헤치며 산과 강을 건너야 한다. 먹고 불을 피우며 살아남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우호적이지 않은 인디언 부족들과 마주쳐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돌아가야 한다. 살아남아야 했기에. 핏츠 제럴드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에게 대갚음해 줘야 했기 때문에. 그 무엇이 이유가 되었든 간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사실 이 여정의 끝은 정해져 있다. 자신이 죽던가 핏츠 제럴드가 죽던가 할 것이다. 반드시 한쪽의 파멸이 예정된, 인간의 생존과 탐욕과 폭력과 잔혹함을 담은 이 비참한 이야기를 감독은 매우 담담하게 담아낸다. 담담하다는 말은 결코 밋밋하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Twenty one Pilots의 노래 'Car radio'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약간의 의역을 더했다.)
Sometimes, quiet is a violence. 때론, 침묵이 폭력의 한 형태가 된다.
그에 비해 이 세상, 자연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고, 강물은 맑고 투명하게 흐르며, 나무들은 조용히 바람에 몸을 맡긴다. 디카프리오는 자신이 마치 사람이라는 이름의 티끌이 된 것처럼 자연이라는 흰 도화지에 조용히 발자국을 찍는다. 피비린내 나는 그의 자취는 지독하게 조용해서, 그 고독만큼의 중력을 관객에게 하사한다. 그 무거운 공기에 짓눌리던 나는 어느 순간 그의 여정에서 순수함을 느꼈다. 눈이 내리는 들판에서 인디언과, 혀를 내밀며, 웃으며, 눈을 맛보는 장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Scene이기도 하다.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아들을 죽인 자에게 반쯤 생매장당하며 버려진 그에게도 눈에 대한 순수한 기쁨이 남아있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악이 나왔음에도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있었던 것처럼.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그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이 남자는 곰에게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아들이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겨울철의 아메리카 대륙에 버려졌다. 그에게 우호적인 것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보다 극단적일 수 있을까? 화면은 이 가엾은 주인공의 순례길을 집요하게 쫓아간다. 대사도 몇 없다. 그의 행동, 표정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지금 보니 맨 처음 언급한 '혹자'의 발언이 절반은 맞는 것 같다. 이 연기는 디카프리오라서 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오스카를 받은 것이리라.
「레버넌트」가 단순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오스카 받은 작품이다.'라는 평으로 끝나기엔 너무나 좋은 영화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길 권한다. 주인공의 눈으로 비정한 숲길을 걸어보길 제안한다. 그가 내는 숨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드러나지 않던 웅장함과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영화를 촬영할 때 리얼리티를 더하기 위해 인공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촬영되었다. 실제 자연의 빛을 활용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