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의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처럼, 한 때 너도 나도 블로그를 하던 그 시기에 적어놓고, 그 후 무수한 시간이 흘렸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블로그 대문 문구다.
묻고 싶다. 당신에게 가장 화려했던, 사랑의 꽃을 피웠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지금 살고 있거나 만나는 사람일까, 아니면 과거 어느 순간의 그 사람일까?
상영한 연도가 기억이 나지 않아, 네이년에게 물어보니, tvN 드라마 <화양연화>가 먼저 뜬다. 제길. 관심조차 없던 드라마에 가려 굳이 앞에 '영화'라고 박아 넣어야 검색이 될 정도로 잊힌 영화 <화양연화>. 아쉽다. 주저 없이 최애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인데.
이 영화를 함께 이야기했던 장만옥 같이 차분했던 그녀의 목소리도, 컷과 컷의 순서도, 정확한 대사도 희미해질 만큼 오래된 영화.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보면 뻔해질 것 같은 노파심에, 고작해야 2,3번 정도로 아껴 보다 보니, 몽환적으로 남은 영화다. 방금 전에 봤다면, 업무적으로 리뷰를 적으려 했을 거다. 정확하지만 먹태처럼 씹는 맛은 별로 없었을 듯.
서랍 속 깊이 숨겨둔 보물상자처럼 언제나 기억이 아름답듯, 왕가위 감독은 영화 <화양연화>의 주인공인 두 배우와 자주 등장하는 배경인 호텔방을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영상에 담았다. 누가 뭐래도 카메라 앵글, 조명, 미장센 등 포스트모더니즘 끝자락의 물감을 흠뻑 먹었다.
호텔방의 절제된 조명과 색감이 농염한 벽지, 포마드로 단정하게 정리한 양조위의 머리, 영화 내내 치파오로 몸을 감싼 듯 한 날씬한 장만옥. 그리고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은 절제된 대사까지. 마치 기억의 박제 속에서 아스라한 사랑을 끄집어내 듯이 중년 커플이 한 점의 유화처럼 아름답게 담겨 있다.(역시 호텔방은 벽지와 조명이 생명이다)
찌릿찌릿 가슴 저린 사랑을 한 번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한 시기인 중년. 그 중년 남녀가 우연한 기회에 조우하게 되고, 서로의 배우자들이 바람을 핀다는 웃긴 상황에서 담담하고 관조적으로, 직접적인 표현도 없이 은은한 눈빛으로 서로를 학습한다. 한 시즌 10편 드라마를 한꺼번에 폭식할 수 있는 성질 급한 2020년의 속도감으론 말도 안 되는 진도 빼기다.(넷플릭스가 시청자들 성격을 다 버려놓았다)
전체적으로 톤이 매우 어둡고, 관계를 연기하는 비현실적인 대사와 연기가 오히려 CM처럼 귀에 착착 감기게 하는 여운을 준다. 현실은 영화처럼 디졸브가 먹히지 않는 컷과 컷의 건조한 연결이다. 현실의 대화를 글로 적어놓으면 종종 보는 유머스러운 카톡 캡처 화면처럼 우스꽝스럽기만 하겠지만.
"당신이 남편과 있다는 생각 하면... 미칠 정도로... 난 나쁜 놈이요."
남들처럼 뻔한 불륜이 되고 싶지 않지만 역시 다를 수 없던 양조위의 인간적인 대사에 한 남자로서 공감한다. 현실에선 그 누가 말해도 영화적인 느낌은 가질 수 없겠지만.
미리 이별 연습을 하는 양조위와 장만옥처럼, 불륜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약속을 갖기 힘들다. 현재가 중요한 만남이다. 유형의 약속이 아닌 현재의 감정과 암묵적인 동의로 유지된다. 연락이 없다고 조바심 낼 수 있어도, 내 욕망을 강요하기 위해 상대에게 화를 낼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이 상처는 마데카솔의 약효도 잘 들지 않을 듯)
성적 긴장감이 있는 관계가 일상과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믿는다. 언젠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화양연화>를 본 이야기를 해주던 한 친구가 떠올랐다. 주말이면 함께 밥과 술을 먹고 함께 쇼핑을 했어도 왠지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구들에게 그녀를 소개를 시켜주기도 했지만, 긴장감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은 끝났었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은 꼭 한 번만 있는 시기일까, 계속 반복되는 걸까. 후자에 한 표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