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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배우, 하이에나

by pdjohn

드라마 <하이에나>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극 중 정금자 변호사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자신이 구입하고 싶은 높은 빌딩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장면. 고개를 든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 김혜수 배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격이 (올라도 너무) 많이 올라버린 서울의 아파트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는 내 모습이 오차 없이 오버랩된다. 너무 주관적이지만, 천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자본주의의 단면 같은 이 장면을, 사연을 가미하고 시크함으로 맵핑해서 근사한 장면으로 만들어 놓았다.

SBS <하이에나>는 어제 16회를 마지막으로 종영되었다. 이 드라마를 제외하고, 근래 시청한 드라마 중에서, 회차별 주요 장면과 대사가, 전두엽에 비비드 하게 살아있는 드라마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김혜수 배우 특유의 자투리 표정과 짧은 호흡까지도. 30여 년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첫 영화 <깜보>에서 보여주었던 조금(사실, 아주 많이) 오글 리거 리던, 설익은 표정 연기가 50살이 넘어 비로소, 잘된 밥처럼 자연스러워진 느낌이다.(어쩌지. 같이 출연한 박중훈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연기로는 미성년 느낌인 걸).

50살이면, 배우들은 그간의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커리어가 만개하거나, 혹은 배우 인생 제2막을 열거나로 구분이 된다. 전자의 경우는 송강호(67년생), 최민식(62년생), 이병헌(70년생), 전도연(73년생), 김희애(67년생) 등 주위에 널렸으므로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후자는 주연에서 개성파 조연으로 전환하거나, 자식에서 부모의 역할로 연령에 맞는 배역을 받고 2선 배치되는 연기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 경우다. 김수로, 이성재, 정준호 등(아쒸, 모두 70년생이네, 더 많은데 생각이 잘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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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배우들은 남자 배우에 비해 생물학적인 변화에 민감하다 보니(여자를 남자와 비교해서 열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 아님), 주연 자리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못한 편이다. '똑똑한 남자+ 예쁜 여자'를 출연자의 공식으로 여겨왔던 TV 프로그램처럼 미디어에선 늘 신선하고 아름다운 마스크를 추구하는 본능 같은 속성이 있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상징적이며 마초적인 본능 외에도,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의지하는) 어린 여자의 관계 설정이 있는 <레옹> 같은 영화도 있다 보니(복잡하다. 이쪽으로 더 들어가면 끝도 없다), 이래저래 여자배우들이 장수하기 힘든 여건이라는 거다.

여하튼, 이번 드라마는, '연기자'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김혜수가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스토리 전개, 전환 그리고 스타일 부분까지 이 '김혜수'라는 튜브를 꾹꾹 짜내어 매끄럽게 진행된 양치질 같은 드라마가 아닌가.

<비밀의 숲>, <미스 함무라비>, <슈츠>(미드 라이선스), <대한민국 변호사>, <리갈 하이>, <마녀의 법정>, <무법 변호사>... 그간 제목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숱한 '법정 드라마'가 있었다. 하나의 드라마가 끝나면, 그 잔상이 기억 속 얼룩으로 오랫동안 남는 '영상의 선순환' 작용이 존재할 겨를 없이, 다른 쌔끈한 드라마로 자리가 메워지곤 했다. 그나마 <비밀의 숲> 정도가 3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억의 폴더 하나를 지키고 있던 이유는, 조승우와 배두나의 연기 때문이 아닐까.

대본이나 영상 연출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아도, 우리 머릿속 1500cc 용적의 두부가 저장하고 있는 건, 얼기설기 얽힌 구성도 멋진 대사도 아닌, 고작해야, 씬과 씬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배우의 번득이는 표정연기와 그 배우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휘모리장단 약간이 아닐까 싶다.(그만큼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보잘것없는, 확증편향적인 오류투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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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드라마는 검사나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보니, 대부분 논리적인 사건의 추적과 증거의 입수에 초점을 두고 전개된다. 법정 드라마라는 장르상 너무나 당연한 소재이다 보니, 이미 우리에게 자극적인 요소는 아니다. 결국, 법정 드라마건 의학 드라마건 그 성공의 조건은 배우의 개성 쩌는 연기와 스타일이라는 결론에 수렴된다. 이 지점에서 그간 <시그널>, <국가부도의 날>처럼 어느 정도 선방한 작품이나 <타짜>, <도둑들>처럼 섹스어필로 성공한 작품 이외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던 김혜수에게 16부작 드라마의 변호사 역할은 어느 정도 모험이자 도전이었을 것 같다.(제작자 입장에서도)

사실 정금자 역할을 하는 김혜수 배우를 보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느껴지는 시크함. 그리고 얼굴 표정, 말투 등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아우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본 작가가 만든 설정에 디테일은 김혜수 배우가 '영끌'해서 자신의 것으로 옷을 입혔을 것이다. 이 점 높이 사고 싶다.


그녀의 첫 필모인 1986년작 <깜보>에서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어른들은 몰라요>, <닥터봉>, <신라의 달밤>, <YMCA 야구단>을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된 그녀의 스타일이 <타짜>, <도둑들>에서 특유의 시크함으로 캐릭터가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하이에나>에 이르러, 그간 찔끔찔끔 맛 보여준 귀여움, 섹시함, 시크함과 같은 개별적인 성격이 골고루 스펙트럼을 펼치며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봐도 어색하지 않을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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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태권도를 잘하는 씩씩한 예쁜 소녀로 시작한 이래, 34년간 일관되게 한자리를 고수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잘 다듬어온 끝에 받은 보상이라고 보면 억지스러운 평가일까. 70살까지도 누추하지 않고 언제나 시크한 모습을 보여주길, 30년 된 팬으로서 응원한다.


*위 글은 비계획적으로 가볍게 적은 내용이라, 분석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음. 양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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