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얼마나 지키기 힘든지를 잘 알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흔한 그 '약속'이 더더욱 쉽지 않다. <첨밀밀>은 식당 전단지 뿌리 듯 약속을 남발하는 시대엔 가당치 않을 만큼, 먼 길을 돌아 돌아서 만나는 애틋하고 절절한 이야기다.
내겐, 보기만 하면, 옆 사람 몰래 흐르는 눈물을 삼키다 결국엔 코까지 풀게 만드는 신묘한 능력을 가진 영화가 있다. <러브스토리>, <애수>에 <길(La strada)>까지 넣어서 '최루 영화 3종 세트'다. 하지만 눈물 없이도 중년남의 가슴쯤은 충분히 먹통으로 만들어 버리는 EMP탄 같은 영화가 바로 <첨밀밀>. 내겐 연애영화의 수학정석, 성문 종합 영어, 오락실 게임 '1942'의 끝판왕(본 적은 없는데.ㅎ) 자체다.
상영 연도가 무려 1997년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외모임에도 당시엔 모두가 열광하던 멕 라이언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유브 갓 메일> 같은 당대 유명한 로코 영화가 모두 기억에서 잊힌 지금도, 바로 어제 '시네하우스'에서 본 영화처럼 느낌이 생생한 영화가 <첨밀밀>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은데, 그때 함께 본 여자 친구는 시대를 초월해서 먼저 갱년기에 안착하지 않았을까 싶다.
<첨밀밀>
홍콩이라는 기회의 땅에 함께 도착했던 젊은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는 먼 시간을 돌아 또 다른 기회의 땅 미국에서 다시 만난다.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운명처럼 다다른 곳에서 그 둘은, 말도 안 되게, 그윽한 미소만을 서로에게 보인다.
마치,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피렌체를 배경으로 다케노우치 유타가와 진혜림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던 표정처럼. <폴링 인 러브>의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이 복잡한 뉴욕의 인파 사이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것처럼 그렇게.(이렇게 대사가 없을 때 비로소 배우의 얼굴은 힘을 발휘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
<폴링 인 러브>
공교롭게도 위에 언급한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불륜'이다. 아니 '운명'이다. 서로에게 솔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 뿐인데, 낙인 받은 자로 전락해버린다.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이기에 절절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선, 안타깝게도 소군과 이요도,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도, 어쩔 수 없이, 순리를 따라 살게 된다. 그리고 10년을 돌아 이요와 소군은 다시 만난 것이다.'회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순간이다.
오래전, 한 여자를 만나면서, 이 친구와 풋풋한 대학시절을 함께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대학시절이 풋풋했던 것은 아니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그런 거니까). 당시는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표현을 그런 방식으로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 다시 그 기회가 온다면, 과거를 유추하지 않고, 함께 보낼 미래를 한번 그려볼 것 같다. 동화처럼 아슬아슬 이어지는 소군과 이요을 보며 든 생각이다.
+) 여름휴가철 맞이 '랜선 홍콩 여행'의 일환으로, <화양연화>에 이어 두 번째 시간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