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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인도로 가는 길

강릉의 명소... 안목 커피거리, 신영극장

by pdjohn

업무 미팅으로 강릉을 다녀왔다.

함께 간 일행이나 현지 파트너도, 강릉에 왔으니 카페 거리를 한 번쯤 가봐야 한단다. 언젠가부터 안목해변에 카페가 하나 둘 늘더니 이젠 카페로만 3층 높이의 건물들이 즐비해진 대표적 관광지가 되었다. 사실 강릉이 경포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이면 많이 찾는 관광지지만 딱히 강렬한 볼거리가 없어, 대포항이 있는 속초나 서핑으로 핫해진 양양에 비해서도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 강릉은 다른 의미를 지닌 도시다. 내게 강릉은, 지금도 잊지 못할 수많은 명화들을 관람했던 '신영극장'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지자체의 지원으로 '독립예술극장 신영'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지만, 80년대엔 서울의 '단성사'나 '중앙극장'(여기서 <숭어>로 데뷔하는 날의 故이은주 배우를 만나기도 했다)처럼 단관 개봉관이었다.

물론, 내 첫 극장 경험은 홍상수 감독의 역대급 데뷰작 <돼지가 우물물에 빠진 날>에도 나온 서울 '신림극장'이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태권브이>로 인생 첫 영화 테이프를 끊고,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몸짱 요정으로 전 세계에 각인된 영화 <코난>으로 본격 극영화의 맛을 보았다. 물론, 당시는 학교 단체 관람 행사인지라 좀 볼만한 애정씬이 나오는 장면이면 어김없이 <시네마 천국>의 극장처럼, 두꺼운 셀로판지를 이용한 뿌연 자체 블러 효과를 주는 바람에 극장 안은 그야말로 야유와 흥분의 도가니탕이 되어 버렸었다. 거의 만화 수준의 액션 판타지 영화가 한 명의 순수한 청소년의 CPU에 갈증 나는 신화로 각인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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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은 서울의 신림극장이었지만, 강릉의 신영극장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영화들을 관람한 그야말로 명화의 전당이다. 할리우드 영화들의 전성기인 80년대 후반, <아웃 오브 아프리카>, <탑건>, <미션>, <라붐>, <백야>, <더티 댄싱>, <폴링 인 러브>, <작은 신의 아이들>과 같은 주옥같은 영화들을 보기 위해 좁은 매표소 앞에 줄을 서고 있자면 지역에서 좀 논다는 학생들이 멀쑥하게 차려입고 삼삼오오 모여들곤 했던, 다운타운의 핫플레이스였다.

하지만, 내게 신영극장이 특별한 이유는, 지금도 주요 장면들이 기억의 플래시 메모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인도로 가는 길>을 관람한 곳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쉽게 정의 내리기 어럽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던가. <인도로 가는 길>은 당시 국내에 예술 영화로 소개되었고, 작품성과 재미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던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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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기억의 의식을 링거처럼 수혈받으며 떠올려보자면, 네이버 영화 리뷰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당시 영화적 사고가 백지상태의 청소년이었던 내게, <인도로 가는 길>의 주요 장면들은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인도인 아지즈를 피고석에 앉힌 영국식 재판장의 열기, 동굴 속에서 아데라와 아지즈의 긴장감, 기다란 인도의 기차 씬, 무수한 검은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던 런던 거리 등.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일상생활 중에 이 주요 장면들이 1~2 프레임씩 발작적으로 떠오르는 이유를 물으며 그간 지내왔다. 나쁜 영화는 3년, 좋은 영화는 10년 동안 기억을 지배한다던데, 이 영화는 따따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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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며 강릉까지 달렸지만, 일정과 동행들을 고려하다 보니 극장이 자리한 시내는 구경도 못하고, 모두가 바라는 안목 커피거리에 들러 커피만 한잔 하고 돌아왔다. 커피는 향기롭고 강릉의 바다는 늘 동일했다. 내 기억의 그 영화처럼.

+)안목 커피거리가 불륜들의 천국이라는 정보를 페친으로부터 입수하고,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봤으나 휴가철인 이유로 가족단위나 젊은 연인이 많아 채증작업은 못함~ 물론 그들이 가족이 아닐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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