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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 Sep 18. 2024

명당인 사천 다솔사에 묘가 없는 이유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가 지배했지만, 조선 명문가의 발전은 풍수가 지배했던 것처럼 보인다. 풍수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학이었지만, 묘지 풍수로 전개되면서 묘지를 통한 가문의 발복과 연계되어 가히 현대의 ‘부동산 광풍’을 넘어서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우리 가문이 더 잘되어야 한다는 욕심과 결합한 풍수는 국왕에서 일반 서민까지 혼을 빼앗았던 아주 큰 문제였다.     

왕가의 예를 보면, 세종대왕의 영릉은 예종(睿宗) 때 상지관 안효례(安孝禮)의 추천으로 경기도 여주에 있는 한성부원군 이계전(李季甸)의 묏자리를 빼앗은 곳이다. 세조의 광릉도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아버지 정흠지(鄭欽之)의 묏자리를 빼앗은 자리이고, 성종비(세조의 손부) 장순왕후의 공릉(恭陵)은 조선 초기 동북면도순문사를 지낸 강회백(姜淮伯)의 어머니 무덤 자리였다고 한다.      

왕가를 따라 사대부들도 명당자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고 애를 썼다. 암장(暗葬, 남의 땅에 몰래 매장하는 것), 투장(偸葬, 이미 잡아놓은 남의 명당에 암장하는 것), 늑장(勒葬, 남의 명당을 권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는 것)은 물론 명당 속의 유골 바꿔치기, 명당의 기존 유골과 섞기 등 온갖 방법들이 횡행하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조선의 예언가이며 격암유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격암 남사고도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이 잡아 놓은 묏자리에다 장사 지내려고 하는데 이 터를 욕심낸 딸이 간밤에 물을 부어 장사를 못 지내게 하고 차지했다고 한다. 다른 자리로 옮겨간 남사고는 자손이 끊기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풍조는 비단 조선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전두환 두 사람 조상의 묏자리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비교적 최근에도 유명 정치인들이 선거 전에 조상(아버지) 묘소를 옮기는 천장으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데 앞의 윤보선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명당 확보 광풍에는 사찰도 비껴가지 못했다. 경기도 양주의 천년도량 회암사에는 조선 최고의 풍수가인 무학대사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스승인 나옹선사, 지공선사의 부도와 함께 사제지간인 고승 3분의 부도가 한 곳에 모여 있다. 이 자리는 무학대사가 생전에 직접 잡았다고 한다. 회암사는 인도 스님으로 고려 땅에 들어와 불법을 폈던 지공화상이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전국사찰의 본산이 되고, 한때는 절의 승려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나 조선 명종 때 불교 탄압으로 불타버렸다. 이 회암사 터 북쪽에 모셔져 있던 무학대사의 부도는 순조 때 광주의 토호 이응준이 훼손하고 그 자리에 자기 선친의 유골을 암장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다행히 이 일은 7년 뒤(순조 28년, 1828) 세상에 알려져 이응준과 이 일을 부추겼던 지관은 외딴섬으로 유배되고 무너진 비석과 부도는 복구되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인 1844년(헌종 10년)에는 왕족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에 묘를 쓰면 2대에 걸쳐서 왕손이 나온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가야사를 불태워 폐사하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였다. 이 이야기는 영화 ‘명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자손이 발복 하는 명당이라는 다솔사도 어려움을 겪었다. 다솔사가 명당이라는 말을 들은 경상감사가 자신 부친 묘를 이곳에 쓰려고 하다가 스님들과 신도들이 탄원하자 왕이 직접 절터에 묘지를 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다솔사 입구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어금혈봉표(어금혈봉표 광서 11년 을유구월, 御禁穴封表 光緖十一年 乙酉九月)’가 그것이다. 광서는 고종 재위 22년(1885년)이다. 이 ‘어금혈봉표’란 임금의 명으로 다솔사 경내에는 그 누구도 묘를 쓰지 못해서 사찰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한 가문의 발복이 아니라 국가와 신도들의 자손 번창을 위해 쓸 수 있었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했고, 신도 또한 부처님 전 발원과 불공으로 자손 번창의 소원을 이뤘다. 추석날 절에서 만난 올해 94세라는 할머니 신도는 본인이 19세부터 70년 이상 다솔사를 다닌 신도인데 다솔사 부처님께 빌어 자손들이 모두 번창했다며 자랑했다. 다솔사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자손이 번창’하는 자리라는 것의 산증인인 셈이다.           

왕이 내린 술을 샘에 부어 모두 나누어 마셨다는 고사처럼, 풍수의 좋은 기운을 모두에게 되돌려서 다솔사의 많은 신도와 방문객의 자손이 모두 발복 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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