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음식 9.단술(식혜)
엄마는 참 해맑았어…. 투명해서 잘 보이는 단술같이
by
김선영
Sep 24. 2023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우리 식구는 한 셋집에 좀 오래 살았어.
강변에 있는 터 좋은 집이었는데, 그 집 주인이 지역 유지쯤됐나봐.
아, 전당포를 했었다. 기억나네…. 무튼 돈이 많은 할아버지였어.
그래서였는지, 어느 설날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집에 인사를 하러 갔어.
(오빠도 갔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
떼 온 물건을 쌓아둘 창고가 필요했던 엄마는, 공간이 넉넉한 그 집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가 확실했을 거야.
그래서 친척도 아닌데 굳이 자식을 대동하고 세배까지 하러 갔겠지.
엄마는 세배를 안 했던가…? 마지막 자존심처럼 말이야.
당시엔 한복을 입고, 동네 친척 집을 다니며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는 풍습이 있던 때라, 설날엔 여기저기 아빠를 따라 부지런히 다녔던 것 같아. 용돈이 생기는 대목이니까.
그런데 유일하게 엄마를 따라 세배하러 간 곳이 그곳이었어.
주인집.
어렸지만 뭔지 모를 굴욕감 같은 걸 느꼈던 나는 꽤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도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싫지만 따라나섰던 기억이 나.
응. 그 기억이 선명한 거 보니, 정말 싫었던 게 분명하네.
주인집 나무 복도를 걸어 들어가 안방에 들어가니, 주인 할머니가 잣과 곶감이 띄워진 수정과를 내 오셨어.
계피 맛이 맴도는 수정과가 어찌나 맛나던지…. 내 생에 첫 수정과였나 싶을 만큼 그 맛이 생생해.
작은 찻잔도 참 예뻤어.
그때, ‘이런 게 부자 맛인가?’ 생각했지 뭐야.
그런데 나는 그 후로 수정과를 먹지 않아.
수정과가 싫어졌거든.
수정과를 마시면 그날이 기억이 났고,
수정과를 마시면 없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굴욕감이 훅하고 치밀었거든.
나는 좀 그래.
누구에게나 고개를 굽히는 엄마와 달리,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아빠를 닮았어.
자존심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했던 엄마와 달리, 자존심이 생명과도 같은 아빠를 닮았어.
그런데 그 후로는 그 집에 세배하러 가지 않았던 것 같아.
엄마도 느꼈겠지.
자식까지 앞세워 구걸한 것 같은 기분을.
차라리 돈을 더 내고 당당한 세입자가 되기로 맘 먹었겠지.
왜 안 그랬겠어?
나도 읽었는데, 엄마도 읽었을 거야.
‘저 가엾은 것들, 딱해라~’하는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선과 태도와 말투를 말야.
아빠와 엄마가 싸우기까지 했을 거야.
애까지 데리고 가서 그래야 하냐는 아빠의 말이 있었을 거고,
이렇게라도 해서 돈을 올려내지 않고, 더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의 말이 부딪혔겠지.
따지고 보면, 모두 맞는 말인데….
아빠도 엄마도 다 우리 가족을 위한 말이었는데…. 그땐 늘 전쟁 같았어.
하늘이 도운 건지, 불안을 먹고 자랐지만, 나는 그 불안을 뛰어넘는 강인한 아이로 자랐지.
엄마의 생명력과 아빠의 자존심을 모두 가진 퍽 굳센 인간이 되었거든.
그래서 매우 고달팠지만, 뭐, 이미 다 지난 일이지….
어쩐지 엄마는 수정과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
대신 단술(식혜)을 해주곤 했어.
누가 엿기름을 줬다며 밥을 짓고
단술을 만들며 아이처럼 신나 했지.
그 번거로운 걸 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참, 순수한 얼굴로 그저 좋아했어.
“우리 딸 좋아하는 단술 해줄게~”
그러고 보면 우리 엄마는 참 해맑았어…. 투명해서 잘 보이는 단술같이.
말도 감정도 솔직해서 그 속에 담긴 다른 의미는 있을 수가 없는, 속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늘 속에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지.
늘 퍼주고, 늘 뒤통수 맞는 멍청이 같았어.
그런 엄마가 답답했지만 나 역시 그런 면이 있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호불호가 명확하고, 감정에 솔직한 인간.
하지만 조금은 달라.
나는 때때로 내 마음에 다른 생각을 품기도 하는 못된 인간이거든.
“딸~ 단술 밥 버리지 말고 엄마 줘.. 원래 이기 더 맛있는 건데, 이걸 와 안 묵노~”
단술의 국물만 마시고, 밥은 먹지 않는 나에게 엄마가 늘 하던 말이야.
매번, 밥이 더 맛있다며, 내가 먹고 남긴 단술 밥을 퍼먹었어.
자식이 먹고 남긴 게 아까워 먹었냐고?
아니, 우리 엄마는 정말 그 단술 밥이 맛있어서 먹은 거야.
울 엄마는 먹는 것에 진심이었거든.
물론, 음식 버리면 벌 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옛날 사람이기도 했고~
아! 불현듯 생각이 나네…. 단술 먹을 때 늘 사용하던 유리그릇이 있었다는 걸….
꼭 그 유리그릇에만 단술을 따라 마셨어. 더 맛있는 느낌이었거든.
엄마는 그 유리그릇에 최대한 밥이 담기지 않게 국물만 따라 주었지.
난 뭘 되게 잘 먹는 편은 아니었는데, 단술은 한 번에 두세 그릇씩 마실 수 있었어.
시원하고 개운하고 달달한 게 딱 내 음료였지.
지금도 단술은 엄청 좋아해서 떡집에서 종종 사 먹곤 해.
여전히 단술 밥은 안 먹지만.
매사 무던했던 엄마가 매사 예민한 딸을 키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 욕봤네~ 참말로.
keyword
엄마
식혜
수정과
Brunch Book
엄마의 음식
06
엄마의 음식 6.카레
07
엄마의 음식 7.칡냉면
08
엄마의 음식 8.추어탕(feat.아빠)
09
엄마의 음식 9.단술(식혜)
10
엄마의 음식 10.호박전
엄마의 음식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10화)
이전 08화
엄마의 음식 8.추어탕(feat.아빠)
엄마의 음식 10.호박전
다음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