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음식 9.단술(식혜)

엄마는 참 해맑았어…. 투명해서 잘 보이는 단술같이

by 김선영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우리 식구는 한 셋집에 좀 오래 살았어.













강변에 있는 터 좋은 집이었는데, 그 집 주인이 지역 유지쯤됐나봐.

아, 전당포를 했었다. 기억나네…. 무튼 돈이 많은 할아버지였어.

그래서였는지, 어느 설날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집에 인사를 하러 갔어.

(오빠도 갔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

떼 온 물건을 쌓아둘 창고가 필요했던 엄마는, 공간이 넉넉한 그 집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가 확실했을 거야.

그래서 친척도 아닌데 굳이 자식을 대동하고 세배까지 하러 갔겠지.

엄마는 세배를 안 했던가…? 마지막 자존심처럼 말이야.




당시엔 한복을 입고, 동네 친척 집을 다니며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는 풍습이 있던 때라, 설날엔 여기저기 아빠를 따라 부지런히 다녔던 것 같아. 용돈이 생기는 대목이니까.

그런데 유일하게 엄마를 따라 세배하러 간 곳이 그곳이었어.

주인집.


어렸지만 뭔지 모를 굴욕감 같은 걸 느꼈던 나는 꽤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도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싫지만 따라나섰던 기억이 나.

응. 그 기억이 선명한 거 보니, 정말 싫었던 게 분명하네.


주인집 나무 복도를 걸어 들어가 안방에 들어가니, 주인 할머니가 잣과 곶감이 띄워진 수정과를 내 오셨어.

계피 맛이 맴도는 수정과가 어찌나 맛나던지…. 내 생에 첫 수정과였나 싶을 만큼 그 맛이 생생해.

작은 찻잔도 참 예뻤어.

그때, ‘이런 게 부자 맛인가?’ 생각했지 뭐야.


그런데 나는 그 후로 수정과를 먹지 않아.

수정과가 싫어졌거든.

수정과를 마시면 그날이 기억이 났고,

수정과를 마시면 없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굴욕감이 훅하고 치밀었거든.


나는 좀 그래.

누구에게나 고개를 굽히는 엄마와 달리,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아빠를 닮았어.

자존심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했던 엄마와 달리, 자존심이 생명과도 같은 아빠를 닮았어.




그런데 그 후로는 그 집에 세배하러 가지 않았던 것 같아.

엄마도 느꼈겠지.

자식까지 앞세워 구걸한 것 같은 기분을.

차라리 돈을 더 내고 당당한 세입자가 되기로 맘 먹었겠지.

왜 안 그랬겠어?

나도 읽었는데, 엄마도 읽었을 거야.

‘저 가엾은 것들, 딱해라~’하는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선과 태도와 말투를 말야.


아빠와 엄마가 싸우기까지 했을 거야.

애까지 데리고 가서 그래야 하냐는 아빠의 말이 있었을 거고,

이렇게라도 해서 돈을 올려내지 않고, 더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의 말이 부딪혔겠지.

따지고 보면, 모두 맞는 말인데….

아빠도 엄마도 다 우리 가족을 위한 말이었는데…. 그땐 늘 전쟁 같았어.

하늘이 도운 건지, 불안을 먹고 자랐지만, 나는 그 불안을 뛰어넘는 강인한 아이로 자랐지.

엄마의 생명력과 아빠의 자존심을 모두 가진 퍽 굳센 인간이 되었거든.

그래서 매우 고달팠지만, 뭐, 이미 다 지난 일이지….




어쩐지 엄마는 수정과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

대신 단술(식혜)을 해주곤 했어.

누가 엿기름을 줬다며 밥을 짓고 단술을 만들며 아이처럼 신나 했지.

그 번거로운 걸 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참, 순수한 얼굴로 그저 좋아했어.


“우리 딸 좋아하는 단술 해줄게~”


그러고 보면 우리 엄마는 참 해맑았어…. 투명해서 잘 보이는 단술같이.

말도 감정도 솔직해서 그 속에 담긴 다른 의미는 있을 수가 없는, 속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늘 속에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지.

늘 퍼주고, 늘 뒤통수 맞는 멍청이 같았어.

그런 엄마가 답답했지만 나 역시 그런 면이 있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호불호가 명확하고, 감정에 솔직한 인간.

하지만 조금은 달라.

나는 때때로 내 마음에 다른 생각을 품기도 하는 못된 인간이거든.




“딸~ 단술 밥 버리지 말고 엄마 줘.. 원래 이기 더 맛있는 건데, 이걸 와 안 묵노~”


단술의 국물만 마시고, 밥은 먹지 않는 나에게 엄마가 늘 하던 말이야.

매번, 밥이 더 맛있다며, 내가 먹고 남긴 단술 밥을 퍼먹었어.

자식이 먹고 남긴 게 아까워 먹었냐고?

아니, 우리 엄마는 정말 그 단술 밥이 맛있어서 먹은 거야.

울 엄마는 먹는 것에 진심이었거든.

물론, 음식 버리면 벌 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옛날 사람이기도 했고~


아! 불현듯 생각이 나네…. 단술 먹을 때 늘 사용하던 유리그릇이 있었다는 걸….

꼭 그 유리그릇에만 단술을 따라 마셨어. 더 맛있는 느낌이었거든.

엄마는 그 유리그릇에 최대한 밥이 담기지 않게 국물만 따라 주었지.

난 뭘 되게 잘 먹는 편은 아니었는데, 단술은 한 번에 두세 그릇씩 마실 수 있었어.

시원하고 개운하고 달달한 게 딱 내 음료였지.

지금도 단술은 엄청 좋아해서 떡집에서 종종 사 먹곤 해.

여전히 단술 밥은 안 먹지만.


매사 무던했던 엄마가 매사 예민한 딸을 키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 욕봤네~ 참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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