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 자유로운 생각들

풀뿌리독립출판 첫 모임

by 새봄새싹

땀에 젖은 문장으로 내달릴 것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으로

순간을 찢을 것


벤치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골몰하다

잠시 모자 속에서 꺼낸 날씨를 산책한다


이리로 가지 마시오

구름으로 가시오


같은 기분 위에 서 있는 오후

사과나무의 기분은 좀 멀고

방향 표지판의 기분과는 가까운


생각을 얼마나 멀리 던지느냐가 이 산책의 관건이다


목줄보다 긴 그림자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산책의 부록이다


날아가기 직전의 모자처럼

바람에 기대앉아

밑줄 가득한 햇빛을 넘긴다


그러니

두 다리를 잃어버릴 것

처음 듣는 음악으로 조깅할 것


지루한 생각을 열고 뛰어다니는 개처럼

첫 문장은 시작된다


- 임지은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문학과지성사, 2019) 중 '부록' 전문




햇수로 따져보니 11년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대학생이던 2009년, 처음 출판 신고를 하러 시청에 가던 그 날이 요즘따라 자꾸만 떠오른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내가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그야말로 막무가내 식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이십 대 초반이었으니, 체력적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여러 후배들이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출판사업에 나섰지만, 대부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물론, 나도 경제적으로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책, 그런 책들을 만들겠다며 항상 바쁘게 돌아다녔던 기억이 전부다. 주요 일간지의 문화면 전체를 내 사진으로 채웠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을까,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고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경제적인 어려움들을 함께 극복해 보자는 목표로 독립출판협회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내가 스스로 부족했던 부분들을 보완하고 수정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기존 '한국독립출판협회'라는 이름을 버리고 '풀뿌리독립출판협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풀뿌리(grassroots) 독립출판협회는 첫째, 독립출판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둘째, 그러나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던 소규모의 '우리들'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공동체가 될 것으로 기대하며 첫 모임을 가졌다.


평일 저녁 시간이라 많이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모인 분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다. 다소 상기되었던 내 표정과 다르게 모두들 밝고 환하게 첫인사를 해주었다. 작가, 출판사, 서점, 문화기획자 등을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구성원들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모인 분들의 면면은 정말 다채로웠다. 유통사 대표, 출판업계 종사자, 영화감독, 사서 등등. 처음에는 어색하고 무수한 질문들과 궁금증들이 가득했지만, 점차로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나는 출판업을 해오며 늘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실현해보고자 했었는데, 이를테면 권익보호, 지원사업, 유통구조 개선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가 될지 여부를 아직 알 수도 없는데(풀뿌리, 라는 이름도. 그리고 협회, 라는 형식 자체도 나중에는 수정되어질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하니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 어느 분의 의견이었고, 그렇게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나서면 사람들은 '네가 뭔데?' 하며 반발심만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결론은 재미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도 재미있고, 우리의 글이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재미있는 일. 그것이 어떤 일로 구체화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 작은 흥분이 일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생각들을 가지자는 것이다. 기성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젊은 시선으로 자유로운 판을 만들자는 것이다.


모임에서 돌아온 후,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 읽었다. 삶이 어렵고 바쁘다 보니 구입만 해놓고 늘 읽지 못하던 책들 사이에서 임지은 시집을 꺼내 들었다. 첫 시집이기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시인이었고, 2015년에 문학과사회로 등단했으니 내가 한창 출판사업에 올인하던 시절이라 시로부터 점차로 멀어지던 시기였다. 오랜만에 시 한 편을 읽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은 새로운 좋은 일들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솔직히, 그동안 어려웠는데 아주 잠깐 그 어려움들을 극복해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마침 밤새 비가 내렸고, 나는 한동안 빗소리를 들었다. 밤에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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