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깎았다
개강을 앞둔 주말이었고
원고를 보낸 다음 날이다.
채 익지 않은 사유와 억지스러운 문장으로 자책했던 시간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집필 작업을 핑계로
그동안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았고
최소한의 도리만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끝을 내야 할 때가 있다.
그걸 예감하면서도 유예했다.
자꾸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주저앉히듯
이발소 의자에 앉았다.
"단정하게 깎아 주세요"
칠순이 넘은 이발사는 말없이
민생지원금으로 맞췄다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작고 날렵한 가위를 들어 내 머리를 깎았다.
큼직한 개업기념 시곗바늘이 돌듯
째깍째깍 머리 깎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도
이발사는 깎고 있었다.
마치 내 머리를 도는 인공위성이나 되는 것처럼
가위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발사의 머릿속에는 '단정하게'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이제 그만 깎아도 될 듯한데
아내와 시내에 나가기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발사는 깎은 데를 골라 또 깎는다.
마치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어느새 내 머리는 잘 깎은 방망이처럼
살가죽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이윽고 내 전화를 기다리다가 이발소로 찾아온 아내는
에어컨 앞에서 서 있다.
착했던 처녀가 성질 급한 중년이 되는 건 스무 해 면 충분하다.
아내가 이발소 안주인이 권하는 믹스커피도 안 마시고
벌겋게 익은 얼굴로 노려 보는 게 거울로 보였다.
나는 이제 그만 단정해도 될 듯한데
미니어처 제작자라도 되는 듯
돌덩어리에 단정함의 정수를 캐내듯
뿔테 안경 너머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깎는 늙은 이발사의 장인 정신을 보니 차마 그만 단정해도 되겠다는 말을 못 꺼냈다.
이발소와 미용실의 차이는
머리를 감을 때 엎드려와 드러눕기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수그리는데
이발사가 비누로 몇 번 문지르더니 머리를 북북 감는다.
마치 채 캐내지 못한 단정하지 못한 생각을 긁어내기라도 하듯이
세 번에 걸쳐 벅, 벅, 벅 머리를 감았다.
이발소를 나와 차를 타니 아내가 아무 말도 안 한다.
'그걸로 삐졌나' 하고 농을 걸어도 대답 없다.
도서관 화장실에서 이발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깎은
'단정한 머리통'을 둘러보니
어느새 늙은 남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