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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덕생 May 26. 2020

섬, 그곳 그리운 밥상 이야기

유년의 어느 날들을 추억하며...

밥상을 차리면서..


 유년시절 길들여진 맛은 혀끝에 새겨진 문신처럼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십수 년을 도회지에서 살고, 그것도 모자라 이민까지 와서 20년째를 살고 있어도, 때때로 늘 어릴 때 먹던 그 음식들이 문득문득 머릿속에 맴돌다... 마침내 입안 가득히 점령하고선 침샘을 자극한다.


    동해의 외로운 섬, 나의 고향, 늘 싱싱한 먹거리들을 제공하는 바다와 산.... 육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나는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아들로 그것도 막내로 태어난 특권으로 할아버지와 함께한 겸상, 천연 냉장고 같은 동네 우물에서 노란 양은 주전자에 물을 길어와 만들어 먹었던 우무묵 냉국,  앞으로 나열할 모든 내 고향 음식엔 어머님의 손맛과 가난을 이기고자 버텨낸 강인함이 배어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유년시절 우리의 혀끝에 머물었던 그 맛의 원천은 가난한 시절, 자식 배부르게 먹여야겠다는 어머님의 집념의 응어리가 뭉쳐진 맛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시작한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유년의 입맛, 늘 자식이 먼저였고, 그래서 당신이 힘들어도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이 먼저였던 어머님의 음식들.. 그런 내 고향의 음식, 어머님의 음식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 보련다.


첫 번째 밥상 :할아버지와 함께한 겸상에 오른 노릇노릇 통통한 고등어구이!


  내 기억들을 아무리 되새겨 봐도 기억이 없다. 할아버지의 모습, 어린 나에게  표식이 될만한 특별한 추억, 이런 것들이 말이다. 그러나 나의 뇌리 속엔, 유년의 어느 날 할아버지 함께 한 밥상의 기억이 또렷하다.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건강이 무척 안 좋으셨다. 아버님은 둘째 아들이시라 분가하여  울릉도에서는 도회지라 할 수 있는 도동에 살고 계셨고, 할아버님께서는 큰집인 서쪽 편 면에 위치한 동네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종종 울릉도에서 유일한 병원인 울릉 병원에 자주 왕래하시었고, 오실 때마다 잠시 우리 집에 머무신 것 같다. 그 당시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할아버님께서 문중의 재산권 문제로 본향인 경주에 있는 집안사람들을 상대로 소송을 하시다 보니 스트레스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되었셨다고 했다.


 그런데, 철없는 나는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 그렇게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그날만큼은 어머님께서 평소에 밥상에 올리지 않는 특별한 음식을 할아버지 진짓상에 올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오시는 날은 나는 특별 대접을 받는다. 아들이자, 막내.. 이 특별한 위치 덕분에 할아버지께서 오신 날은  평소와 다른 할아버지의 밥상에 나는 겸상을 하는 특권을 누린다.  


오랜만에 오신 할아버님이시기도 하지만 건강이 안 좋으신 할아버지를 위해 어머님은 특별한 상을 차리신다. 할아버지와 겸상을 한 그날, 어머님이 마련한 특별한 음식은 연탄불에 소금 간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등어구이였다. 기름기가 자르르 감도는 노릇노릇 구워진 감칠맛 나는 고등어구이이지만 할아버지는 두툼한 살점을 떼어 내어 자꾸 내 앞으로 내미신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할아버님이 고등어구이를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분가하여 사는 둘째 집의 막내 손주를 위해 당신이 좋아하시는 반찬 이건만 기꺼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손주를 위해 당신의 것을 내놓으시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할아버지는 세상을 하직하셨다. 지금도 할아버지의 모습을 아무리 기억해 보려고 해도 뚜렷한 기억이 없다. 다만 존함과 그리고 그 밥상의 짧은 추억만이 기억될 뿐이다. 어쩌면 짧은 그 밥상의 기억이 나에게 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기억중 가장 큰 기억이겠지만, 내 나이 예순에도 그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할아버지의 내 핏줄에 대한 지극한 애정 그것이 아니었나 싶다.



두 번째 밥상 :  섬사람들의 삶만큼이나 소박하고 투명한 우무묵 냉국


 어머님의 손끝은 거치셨지만 그 손끝에서 설어낸 우무묵은 맑고 투명하며 곱다.
여름이면 어머님은 마당 귀퉁이에 솥단지를 걸고 노란 우뭇가사리를 삶아 투명한 우무묵을 만드시곤 했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노란 우뭇가사리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뿌연 액체만이 솥단지에 가득해지고, 그 뿌연 액체를 식히면 맑고 투명한 우무묵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무묵은 여름 내내 우리의 간식이자, 별미가 된다.


우무묵이 만들어진 날에 시원한 냉수를 길어오는 일은 내 몫이 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마을마다 차디찬 얼음물을 내어주는 우물이 하나씩은 있었다. 섬마을 나의 동네에도 온 마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우물이 있었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한가득 물을 길어 오면 양은 주전자 겉면에 송글 송글 물방울이 맺힐 만큼 차가운 물이다.


잘게 채 썰은 우무묵을 고추장과 깨소금을 곁들인 양념에 송송 썰은 풋고추를 곁들여 버무린 뒤 참기름 몇 방울 떨어 뜨리고 갓 길러온 찬 우물물을 부으면 목구멍 시원히 넘기기 좋은 우무묵 냉국의 완성이다. 후루룩 한 그릇 들이키면 허전해 오는 배를 채워주면서 만사가 든든해진다.


우무묵은 특별히 스스로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소박한 양념으로 그 맛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섬사람들의 삶만큼이나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 아닐까?  그저 단순하기만 한 요리법에 때로는 섬사람들의 목마름을 달래 주고, 때론 허기진 배를 채워 주는 음식일 뿐, 화려한 잔치상이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오르지 못하는 음식 이건만 만들어지는 과정은 섬사람들의 고된 노동이 배어있는 음식이다. 채취 과정에서부터 , 우뭇가사리를 삶는 과정, 그리고 묵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다른 묵들처럼 고되고 지난하다. 어쩌면 내 부모님의 삶과 참으로 닮은 섬의 먹거리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세 번째 밥상 :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님의 레시피, 홍합밥.. 우리 집 대표 메뉴가 되다.


홍합밥은 지금도 울릉도의 대표적인 먹거리 이면서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음식 중에 하나라고 한다. 어린 시절, 좁은 섬에서 특별한 놀이가 없던 우리에겐 여름철이면 솥단지 메고, 고추장 챙겨 들고 해서 한적한 바닷가에 물놀이를 가곤 했다. 한참 물놀이를 하고 배가 출출해질 때면 지천에 늘려 있는 홍합을 따서 밥을 안칠 때 홍합살을 넣고 만든 것이 우리 머슴애들끼리 해 먹는 그냥 그런 홍합밥이다. 다된 밥을 고추장에 썩썩 비벼 먹으면 매콤하면서 홍합의 향긋한 향이 입속에 가득하게 퍼지고, 물놀이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머슴애들끼리 해 먹는 홍합밥은 제대로 된 홍합밥이라긴 보다는 홍합을 넣은 밥에 불과한 것이다.
 
언제 적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머님 해 주신 홍합밥의 레시피가 남아 있었다.
  
‘잘 달구어진 솥에 참기름을 살짝 두르고 싱싱한 홍합을 다글 다글 볶은 다음, 적당하게 물을 맞추어 미리 불려놓은 쌀을  안치면 된다. 밥이 완성되면 취향에 따라 파 송송 썰은 간장 양념이나 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되는 것이다. ‘

도시로 나와 어른이 되고, 그리고 결혼을 하여 집사람에게 홍합밥 만드는 법을 일러 주었다.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홍합을 구입하여 내 기억 속의 어머님 레시피대로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살짝 두르고 다글 다글 볶은 다음, 미리 불려놓은 쌀과 함께 전기밥솥에 앉혀서 완성한 홍합밥, 약간은 붉고 노란 빛깔의 밥알이 입속에 가득 채워지면 , 바다의 향과 고향의 냄새가 입안 가득 스며들면서 어릴 적 먹던 홍합밥의 그 맛이 생생히 느껴졌다. 도시에서 자란 집사람도 대만족이란다.

그리하여 홍합밥은 우리 집 대표 음식이 되어, 직장 동료들을 초대한 집들이 때도 주전 자리를 당당히 굳혀 갔다.
 
 20년 미국 이민 생활에서도 향수처럼 맛의 기억은 가끔씩 내 혀끝을 자극하였고, 그러면 우리는 한인 마트로 달려가 홍합을 사 왔다. 그리고 유년의 시절 기억의 맛, 성인이 되어 다시 되살렸던 그 맛을 온갖 솜씨를 다 발휘하여 끄집어내곤 했었다. 그런 날이면 이동원의 ‘향수’가 집안 가득히 채워지고 우리는 혀끝으로, 그리고 귀로 옛 추억에 잠기곤 했었다.




네 번째 밥상 : 꽁치 물회와 꽁치 경단 미역국


워낙 어린 시절 기억이라 내 유년 시절에는 섬사람들이 어떻게 꽁치를 잡았는지 기억은 없다. 다만, 어른들의 말씀 중에 손꽁치가 제맛이란 말씀은 기억 속에 뚜렷하다. 아무튼 내 유년의 시절에는 섬마을에 꽁치는 차고 넘쳤다. 내 기억으론 삼시 세끼 내내 다양한 형태로 꽁치 반찬이 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겨울철 명태 잡이 시즌에는 명태 주낙 미끼로 썼든 꽁치포도 반찬으로 올랐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내 어린 시절 꽁치는 그물로 잡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옛 추억을 얘기하시면서 손꽁치 맛을 입에 올렸을 테니... 손꽁치는 말 그대로 손으로 잡아 올리니 성질 급한 꽁치 녀석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그만큼 더 싱싱한 꽁치를 얻게 되는 옛 울릉도의 전통 어로 방식이다.
 꽁치를 재료로 만드는 요리는 다양하지만 울릉도 사람들에게 단연 으뜸은 꽁치 물회이다.

아버님은 늘 비린 것, 육고기 이런 것을 좋아하셨고, 반대로 어머님은 거의 채식 주의자에 가까울 정도로 육고기는 입에 대시 지도 않으셨고 생선도 비린 것은 드시지 않으셨다. 아마 우리 형제들 입맛도 아버님 입맛을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비린 것을 좋아하시는 아버님은 자주 두름 꽁치를 집으로 들고 오셔서 포를 뜨시고, 어머님께서는 당신이 드시지는 않지만 풋고추, 오이, 깻잎, 미나리, 배, 등등 갖은 야채를 총총 썰어 재료를 준비하신다. 그렇게 정성 들여 준비하시는 것은 식구들에 대한 모성, 그것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날만큼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꽁치 물회 파티를 연다.

 잘게 썰은 꽁치회와 어머님이 준비하신 각종 야채와 그리고 고추장에 된장을 약간 썩은 양념, 깨소금, 참기름 몇 방울 이렇게 해서 버무린 꽁치 회무침이 큰 양푼 가득 채워지면 각자 들고 있는 대접에 꽁치 회무침을 들고 그리고 찬물을 붓는다. 꽁치의 부드러운 육질과 아삭한 배와 야채, 얼큰하고 차디찬 국물을 한 숟갈 입에 넣으면 입속 가득 시원함이 넘친다. 그렇게 몇 숟가락으로 물회의 맛을 음미하고는 찬밥을 말아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모두 비우고선 포만한 행복감에 젖는다.
 
 꽁치 물회의 아련한 추억은 우리 형제 모두에게 공통으로 잠재되어 있어, 지금도 가끔 고국을 방문하면 형님과 누님은 싱싱한 꽁치를 구해 오셔서 꽁치 물회를 내놓으시고 옛날 맛을 되새기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꽁치로 만들어진 음식 중 꽁치 물회만큼이나 울릉도의 독특한 음식 중 하나는 꽁치 경단 미역국이다.
꽁치를 뼈째 잘게 다져 동그랗게 경단을 만들고 미역국을 끓일 때 그것을 수제비처럼 톡톡 던져 넣어 만든 음식이다. 약간 비릿하면서 고소하게 십히는 꽁치 경단의 맛과 미역의 시원한 맛이 어우러져 바다를 가져다 밥상에 올려놓았다고 표현해도 과히 과하지 않을 것이다.

비린 꽁치만큼이나 비린 맛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은 어쩌면 속일 수 없는 섬사람의 유전자가 흐르는 모양이다.



다섯 번째 밥상 : 맑은 오징어 내장국과 오징어 누런 창 찌게


사람들은 울릉도 하면 가장 먼저 오징어를 떠올릴 것이다. 오징어 잡이는 거의 모든 울릉도 사람의 생업이며 섬사람들의 고난이 묻어 있다. 남정네들이 밤새 오징어를 잡아 오면 부녀자들은 이른 새벽 부두로 나가 잡아 온 오징어 배를 가르고 손질하여 스무 마리씩을 대나무 막대에 꽂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하여 집 가까운 곳에 만들어 둔 덕장에 널어 둔다. 내 기억으로는 그 이후에도 2~3일 동안 일곱, 여덟 차례의 손질을 거친 뒤에 마른오징어가 완성된다.

오징어는 먹통과 눈알을 빼고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징어 배를 가르고 손질할 때 얻는 내장은 두 가지이다. 하얀 색깔의 내장과 냄새도 고약한 누런 창이다.( 울릉도 사람들은 고약한 냄새와 색깔 때문에 ‘똥창’이라 불렀다.)

 그렇게 어머님은 오징어 손질할 때 얻은 내장을 간직해 두셨다가 찬을 만들어 내셨다. 오돌오돌하게 삶은 흰 내장은 살짝 말려 두고, 똥창은 소금 간에 저장해 두셨다.
 
여름날이면 개천 뚝에 자라는 호박 덩굴에서 호박잎을 따다, 삶아서 말려둔 오징어 흰 내장을 넣고 맑은 국을 끓여 내셨다. 흰 내장의 쫄깃한 식감과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 맛은  순수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어서 소개될 오징어 누런 창 찌개는 반대로 투박하고 거칠다고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묘하게 여운을 남기고 끌리게 하는 매력이 있다.

찬바람이 불고 제법 쌀쌀한 계절이 돌아오면 어머님은 독에 염장해둔 오징어 누런 창을  꺼내서 된장 조금 넣고 시래기를 총총 썰어 넣어 찌개를 끓이신다. 그 냄새는 정말로 강력하다. 구수한 냄새와 더불어 사람에 따라서는 역겨워할 만큼의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자글 자글 끓여낸 찌개를 밥 위에 올려 쓱쓱 비벼 먹으면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다.

누런 창은 또한 된장과 더불어 뽀글뽀글 졸여서 쌈장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부산 사람인 둘째 형수가  그 맛에 푹 빠져 버렸으니 무언가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맛임에 틀림없다.

언제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일식집에서 오징어 누런 창으로 만든 소스가 나와 정말 반갑기도 하고, 똥창이라 부르며 푸대접받는 것이 고급 일식집에서 등장한다는 것이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누런 창 찌개는 뜨거울 때는 구수한 맛이 역겨운 냄새를 상쇄하지만, 식으면 지독한 냄새는 상상을 초월해 버린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가을날 아침 밥상에 오징어 누런 창 찌개가 올랐었다. 그런데 그만 밥을 먹다 누런 창 찌개를 쏟고 말았다. 단벌 교복인데 어쩔 것인가? 대충 걸레로 닦고 학교로 갔는데..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오징어 부산물로 만들어진 공통점을 가졌지만 빛깔과 맛의 특성이 서로 대비되는 두 음식은 변화무상한 울릉도의 날씨와 이에 순응해가는 섬사람의 삶과도 참 많이 닮았다.


 여섯 번째 밥상 : 한겨울밤에 먹는 김치보쌈 오징어회


오후 다섯 시면 우리 집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른 저녁을 지으시고 아버지는 오징어 채 낚기 연장을 챙기신다. 아버지는 저녁을 드시고 도시락을 챙겨 오징어 잡이를 나서신다.

오징어 잡이는 여름이 제철이지만 한겨울에도 오징어 잡이는 계속된다. 그렇지만 겨울철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한밤중에 귀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밤중에 돌아오실 때면 아버지는 살아서 펄떡이는 오징어를 몇 마리씩 도시락인 군용 반합에 넣어 오신다. 어머니는 가지고 오신 오징어를 손질하시어 잘게 채를 써시고 살얼음 살짝 덮인 김장 김치와 함께 내놓으신다. 밤참인 셈이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포기김치를 쭉 찢어 그 위에 갓 잡아서 맑고 투명한 오징어 채를 얹어 우물우물 씹으면 몰캉 그리는 느낌과 차고 아삭한 느낌이 온 입에 가득해진다. 겨울 동안은 우리는 자주 섬사람들만의 야식으로 한밤을 즐기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내가 일찍 잠들었고 내가 잠든 사이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주변에 두런두런 소리에 잠이 깨었나 보다. 아뿔싸! 이미 우리의 특별한 야식 파티는 시작되었고...
‘ 막내도 깨워서 같이 먹어야 안 되겠나’
‘ 자는 아를 말라꼬 깨웁니꺼.. 그냥 자게 놔두소 ‘
이런 소리들이 들리고, 잠에서 깼지마는 일어날 수도 없는 막막한 상황... 자는 척 눈을 꾹 감고 있는데, 입속에선 침이 마냥 고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 내 깻심더’ 하고 일어나 같이 먹으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절의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겨울밤 섬 아이의 아쉬움은 그렇게 또 추억으로 간직되어 예순의 나이에도 가끔씩 생각을 떠 올리며 혼자 피식 웃곤 한다.


일곱 번째 밥상 : 귀향한 자식에게 꼭 내주시던 메바리회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 마음이 자식들은 당신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실 게다. 섬마을 부모님들은 더더욱 그랬다. 우리 집도 큰 형님을 제외하곤 모두가 육지로 나와 일터를 잡거나 공부를 했다. 나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육지로 나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방학이면 고향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님이 내어 주신 특별한 음식이 기억에 새롭다.

막내아들이 집으로 오는 날이면 어머님은 부두로 가셔서 메바리( 붉은 색깔이 아름다운 생선, 양볼락과 에 속하는 도화볼락, 우리는 ‘메바리’라 부른다.)를 사 오셨다.

오랜만에 집에 온 자식을 위해 메바리를 손질하시어 듬성듬성 잘라, 미나리 깻잎 무 채 등 갖은 야채를 양념에 버무려 회무침을 만드신다. 아마 어릴 적에 맛나게 먹던 그 모습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셨으리라.

메바리는 뼈가 연하고 하얀 육질은 쫄깃하기 때문에 포를 뜨지 않고 뼈와 함께 썰어서 먹어야만 메바리 회의 제맛을 느낄 수가 있다. 달콤하고 새콤한 양념장과 더불어 입속에서 씹히는 쫄깃한 육질과 아삭한 뼈의 식감.. 그리고 자식에 대한 어머님의 사랑까지 더한 맛은 일품 그 자체이다.

메바리는 참 귀한 생선인 모양이다. 어른이 되어 도시에 살 때 메바리회가 생각나 수산시장을 뒤져 보아도 메바리는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막내아들에 대한 어머님의 애정이 그리워 그렇게 수산 시장을 뒤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앞으로 5년이면 백세가 되시는 어머님께 전화 한 통을 드려야겠다.
‘ 어무이! 메바리회 먹고 싶습니더’ 라고 말이다.

언젠가 고향을 찾게 되면 제일 먼저 메바리 회를 먹고 싶다. 자식에 대한 어머님의 사랑까지 듬뿍 담아 양푼 가득히 내어준 그 회무침을 말이다.


여덟 번째 밥상 : 명이 나물 이야기


겨울이 이제 막 지나치고 아직은 잔설이 남아 있는 이른 봄이면 어머님은 보자기, 망태를 챙겨서 봄나물을 뜯으러 가신다. 울릉도에 고사리, 고비 등등 온갖 귀한 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명이 나물이 으뜸이다. 그 시절 나물 캐기는 대중가요에 묻혀 있는 ‘ 봄바람 살랑대는 들판에 나물 캐는 아가씨야’ 란 이미지와는 상반된 생업이요 노동이다.

명이 나물은 산마늘의 일종인데, 할아버지 시대의 가난한 시절, 곡식이 부족한 시절에 사람들의 명을 이어 주었다고 하여 명이 나물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어쩌면 이름까지도 숙연하게 만드는 그런 나물이다.

아침에 보따리, 망태를 챙겨서 산으로 가신 어머님은 오후 늦을 무렵에 당신의 덩치 보다도 몇 배나 큰 나물 보따리를 메고 돌아오셨다.

그렇게 몇 보따리로 메고 오신 나물들은 대부분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장에 내다 파시는 나물이다. 장에 내다 파실 나물들을 정리하시고 남은 것들은 식구들을 위한 반찬거리가 된다. 그 시절 명이 나물은 장아찌로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 사철 내내 밑반찬으로 먹었다.

 명이 장아찌를 밥 위에 올려 쌈을 싸듯 입에 넣으면 알싸한 마늘 맛과 더불어 장아찌 특유의 짭쪼로한 맛이 입안을 채운다. 어쩌면 그 짭조로 한 맛은 어머님의 땀 맛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울릉도에서 명이 나물을 재배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시절엔 산 이곳저곳을 누비며 어머님은 명이를 채취하셨을 것이다.

어느 날 인가 , 애틀랜타에 있는 대형 한인 마트에 들렀다, 우연히 경상북도 특산품 코너에서 울릉도 명이 나물 장아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몇 봉을 주섬 주섬 주워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참 오랜만에 고향 맛을 보는데... 문득 어머님의 힘겨운 노동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게 차오르고 목이 메었던 것은, 늘 잊을 수 없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 자식들을 위한 희생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속에  항상 고여 있는 까닭일 게다.


아홉 번째 밥상 : 잔칫집 배상에 오른 비계 두툼한 돼지 수육


나는 옛날의 잔칫집이 마냥 그립다.
정형화된 맞춤 음식들이 서빙되는 요즘의 잔칫집은 어떤 집안의 잔칫집을 가더라도 늘 똑같은 메뉴, 늘 똑같은 맛으로 통일된 느낌이다. 내가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결혼한 나도 예식장에서 정해준 음식점에서 지정된 메뉴로 그렇게 손님들을 대접했으니까...

내 기억으론 국민학교로 들어가기 전에 일이었던 것 같다. 육촌 중에 가장 맏형이신 형님의 결혼식으로 기억된다.

산마루에 위치한 오촌 당숙 댁엔 그 당시엔 마당 넓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육촌 형님의 결혼식이 이루어졌고, 마당 가운데 천막을 치고, 군데군데 화덕을 설치하여 무쇠 솥뚜껑을 걸어 전을 부치고, 그렇게 분주하게 친지, 이웃들이 모여 잔치 준비를 하였다.

잔칫집에는 천막 속에서 준비된 음식들을 하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배상이라고 불렀다. 배상을 담당하는 사람은 친지 중에서 젊은 남자들이 담당하였다.

어린 우리들은 제사보다는 젯밥이라고 잔치보다는 배상을 하는 천막 주변을 뱅뱅 도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러면 배상을 담당하는 친지는 우리들에게 비계가 두툼한 돼지 수육과 각종 부침을 주시곤 했다.

집에서 키운 돼지를 어른들이 계곡에 가서 직접 잡아 마련한 돼지고기라 비계가 두툼한 수육이라도 그렇게 맛나고 고소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육고기를 자주 접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 돼지 수육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늘 옛날 잔칫집이 그립다. 그 분위기, 그 독특한 집안의 맛, 떠들썩한 분위기.... 그 모두가 그립다.


밥상을 물리면서......


  섬, 그곳 나의 고향과 그곳에서 지낸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그립고, 예순의 나이에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 설레고 오래된 영화를 보는 듯 눈에 아련인다.

유년의 시절 먹었던, 늘 잊지 못하던 그 맛들, 그리고 그 먹거리에 깃들어진 섬사람들의 일상과 부모님들의 고단함을 글로써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만, 나는 아홉 가지의 밥상으로 그 잊을 수 없는 맛과 추억들을 차려 보았다.

어린 시절 맛의 기억들은 문득문득 기억 속에 살아나 때때로 침샘을 자극하고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추억까지도 낚아 올리며 삶의 즐거움을 더한다.

어쩌면 유년의 시절 우리가 먹던 먹거리 속에서는 대대로 이어온 섬사람들의 고난이 배어 있고, 부모님들의 삶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아홉까지의 밥상을 준비하면서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앞으로 또 십수 년을 더 살면서도 자주 그 옛날 유년의 맛을 떠 올리고 기억하게 될 나는 천상 섬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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