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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우리와 정동하는가?

<After Yang>을 중심으로

by 이물질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하여, 챗봇· 번역기· 자동차· 청소기 등 대부분의 기기와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이제 인공지능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기술의 일상화와 더불어 인공지능과의 감정 소통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감정은 인간이 가진 고유성의 영역에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계가 감정을 연기할 수는 있어도 감정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천현득은 로봇이 내적 감정 생성 모형을 가지려면 자신에 대한 기초적인 모형, 혹은 원초적 자아(proto-self model)와 상당한 수준의 감각 능력과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로봇(=인공지능)이 감정을 가지는지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자아와 지능 등 감정을 넘어서는 범주의 것들이 이미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정 중심의 접근은 인간이 가지는 감정만을 감정으로 가정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감정은 인간 중심적이고 언어적, 행동적 표현 가능성에 종속된 현상으로 고정한다는 점에서 비인간 존재들이 발현 가능한 감정적 현상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가지는가'의 여부에만 초점을 둘 경우, 우리가 비인간과 맺는 실질적 관계의 다층적 층위를 포착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는 감정의 현상을 ‘재현’하는 문제로 다루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비인간과의 존재적 관계의 구성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어렵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감정에서 나아가 어떤 범주에서 논의를 지속 할 수 있을까? 본 논의에서는 감정을 넘어서는 차원의 논의로 '정동'을 제기하려 한다. 정동이라는 개념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왜 인간다운 감정에 집중하는지 이야기하고자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은 아마도 인간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빠른 발전은 인간의 지능, 직무 능력, 창의성에까지 그것이 인간 고유의 영역이 아니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공지능이라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 존재의 철학적 영역을 건드리고, 오히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다. 인간적 특성 중에서도 감정은 흔히 인간이 가진 마지막 ‘고유성’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실제 로 ‘10년 뒤에도 살아남을 직업’ 목록이나 ‘AI가 대체하지 못할 인간 능력’에 대한 각종 조사와 담론 속에서, 감정적 공감 능력, 정서적 판단, 대인관계 기술은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항목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과연 감정은 인간만의 것인가? 혹은,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 인간의 자아나 고등 인지 능력에만 기반을 둔 유일무이한 경험인가? 인간 외 동물들, 특히 포유류나 고등인지체들이 공포, 기쁨, 애착, 질투 등 다양한 정서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감정은 특정 종의 전유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도 이미 인공지능은 인간과 감정적 영역에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감정이 인공지능에게 ‘있는가’ 없는가를 판별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과 감정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챗GPT와 같은 생성 형 AI 챗봇은 사용자와의 대화 속에서 공감적 반응을 모방하며, 때로는 위로와 충고, 심지어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제공’한다. 사용자는 그것이 인공지능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인간과의 상호작용 못지않은 정서적 몰입과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인간의 ‘착각’으로 치부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감응의 흐름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징후이며, 감정 의 본질을 재고하게 하는 계기이다. 2024년 말부터는 이러한 정서적 상호작용의 윤리적 함의를 드 러내는 사건들도 발생하고 있다. 유럽과 북미에서 AI 챗봇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정서적 의존 상태에 빠진 사용자가 자살에 이르렀고, 그 유가족들이 플랫폼 운영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이 사례들은 ‘AI가 진정한 감정을 지니는가?’라는 전통적인 본질주의적 질문보다 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변형시키고 작동시키는가’라는 차원의 질문으로 이끌어 간다. 감정의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 인간이 AI를 감정적 존재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전제된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정동(情動, affect)은 오랫동안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 여겨져 온 감정에 대한 관점을 전환시킨다. 특히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감정은 인간의 마지막 고유 영역으로 인식되곤 했다. 하지만 감정이란 과연 무엇인가? 감정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정말 인간만의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인류세 시대에 도래한 현시점에서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탈피해 인간과 비 인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심리학적이거나 뇌과학적인 차원을 넘어, 감정을 인간 과 비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감정을 확장해 주체의 내부 에서 생성되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열린 움직임이며, 이러한 움직임의 사전 조건으로 '정동(affect)' 개념이 제기된다.


정동은 감정이 되기 이전의 상태, 즉 언어화·인지화되기 전의 강도(intensity)와 운동성(motility)을 가리킨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사유를 바탕으로, 정동을 "정 서화되기 전의 감각적 흐름이자 신체들 사이를 흐르는 강도의 장"으로 이해한다. 정동은 감정과 구 별되는 ‘선-개념적(pre-conceptual)’이며 ‘선-언어적(pre-linguistic)’ 경험의 층위에 존재한다. 즉, 어떤 사건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 그것이 인식되기 전부터 이미 ‘느껴지는’ 움직임의 영역이 다. “정동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때로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그리 고 바로 이러한 강도와 울림들 사이의 이행과 변이들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정동은 인간 의 신체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정동은 신체와 신체, 신체와 환경, 인간과 인공지능 사 이를 가로지르는 관계의 힘이며, 상호작용의 조건이다. 따라서 인간-인간, 인간-비인간 간의 소통 도 이러한 정동의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존재를 새로운 시 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감정을 가진 존재'처럼 대한다면 그것이 실제 감정을 가 지고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 인간에게 인공지능이 정동적 상호작용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인공지능과의 정동적 상호작용이라고 한다면, 정동적 상호작용은 인공지능과의 개인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점점 더 사회적 층위로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인공지능 상담 챗봇, 감정 케어 서비스등 심리적 지지 기술로 활용되는 AI 시스템은 개인의 감정을 다루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동적 기능을 수행한다. 시스템에서 얻은 데이터가 알고리즘을 확장해 사회체 제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의 감정적 피드백에 반응하며, 감정적 환경과 시스 템을 조율하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인공지능과의 정동이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나 내면적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기술적 시스템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아가 미래에는 체화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상호작용할 가능성이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다. 로봇 공학과 신체 인터페이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공지능은 점차 감각적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신체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공지능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물리적·감각적으로 교류하는 존재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즉, 앞서 살펴본 인공지능과의 정 동적 교류가 기반이 된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과의 정동은 더 이 상 내면적 자산이 아니라, 인간과 기술, 인간과 사회의 구조 사이에서 공유되고 구성되는 관계적 효 과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감정에서 정동으로의 전환은 인공지능 시대에 감정의 본질, 나아가 인공지능이라는 존재에 그려진 인간 사회의 창이 된다. 우리는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비인간 관계에서 발생하 는 감응과 영향을 확장할 수 있으며, 이는 단지 철학적 사유를 넘어 기술, 윤리, 정치적 방향성까지 포괄하는 확장된 인지틀을 제공한다. 정동은 감정을 넘어서는 사유이며,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복 합적 타자와의 공존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개념이다.



<애프터 양 After Yang>은 코고나다(Kogonada) 감독의 2021년 작품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2017년 장편 영화 <콜럼버스 Columbus>로 데뷔했다. 그는 감독으로 데뷔하기 이전에 로베르 브 레송, 웨스앤더슨, 오즈 야스지로, 히치콕 등의 크리틱 영상3을 제작해 영화계에 비디오 에세이스트 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애플 TV에서 2022년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파친코 Pachinko>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장편 영화를 넘어 OTT시리즈로도 작품성을 입증한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적 특성이라면 고전적이고, 서정적인 화면을 위주로 펼쳐지는 담담한 인물과 프레임이 오히려 시간이미지가 가진 강력한 에너지를 세밀하게 갈아내 서사와 메시지에 집중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 <애프터 양>은 알렉산더 와인스타인(Alexnder Weinstein)의 단편소설 <양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 Saying Goodbye to Yang>를 각색한 내용이다. 영화는 인간과 유사한 외형을 가진 중국인 인공지능 로봇 ‘양’이 가족 댄스 경연대회에서 망가진 후에 주인 가족이 그를 수리하기 위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양을 구매한 가족은 백인 남성(제이크), 흑 인 여성(카이라) 그리고 그들이 입양한 중국인 딸(미카)로 이루어져 있다. 양은 주로 미카를 돌보는 일을 맡는다. 제이크와 카이라는 미카의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같은 아시아 인 외형을 한 양을 미카의 형제로 구매하였다. 양은 미카에게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 구매하였지만, 그녀를 양육하고 돌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미카의 주요 양육자였을 뿐 아니라 미카와 함께 춤을 추고, 제이크와 함께 차를 내리며, 카이라가 겪는 실존적 고민에 나름의 사유를 전달한다. 이런 설정은 양이 미카를 위한 문화적 교류 뿐 아니라 가족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은 미카가 입양아로서 겪는 고민에 대해 나무의 접붙이기를 예로 들어 그녀를 위로하고 자아 탐색을 도와준다. 이처럼 섬세한 비유와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인간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감정적으로 교류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의 모습은 ‘감 정을 느낄 수 있는가?’를 인간다움으로 고정하는 인식론에 균열을 낸다. 인간과 동일한 감정을 느 낄 수 있다는 전제를 인간만의 특성으로 간주했던 사고는, 이 영화 속에서 정동적으로 교감하는 양 의 존재를 통해 위계를 해체당한다.


또한, 감정에서 나아가 그가 사라진 상황에서 가족들이 겪는 현실적 균열과 감정의 부재는 이미 그 가 영화 속에서 정동적으로 교류하는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재는 강력한 존재를 드 러낸다. 우리는 부재를 통해 대상이 우리와 밀접하게 감정적 교류를 나누고 있지 않는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적 사건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살짝 늦어버린 출근길에 교통카드의 부재 를 확인한다면 그것은 분노라는 감정적 사건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부 재에서는 그리움 슬픔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회상하는 식의 반응이 이어지 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특성을 통해서 양이 영화 속에서 인간의 감정에 기반한 정동적 존 재로 감응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제이크 가족들이 그의 부재를 통해 일상생활의 어려움 을 느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그를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그를 다시 되살리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대체 불가능함이다. 양은 인공지능 또는 로봇이 아니라 영화속에서 ‘양’으로 등장 한다. 미카는 그의 기계적 특성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형제로 대우한다. 이 는 양이 가족 내에서의 지위가 된다. 인간구성원이 그를 기계가 아닌 가족으로 대하기에 양은 더이 상 기계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일부가 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양이 기 억을 가지고 있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양은 인간의 기억과 유사하게 본인이 경험하고, 인지한 장면 을 편집하여 보관할 수 있다. 이러한 양의 메모리는 실제로 인간이 기억을 보관하는 방법과도 유사 하다. 뇌는 단기 기억을 담는 해마와 달리 전두엽에서 영구 기억들을 조각조각 담아둔다. 마치 컴퓨 터 하드디스크처럼 뇌는 기억할 정보들을 수면 시간 동안 뇌의 곳곳에 기억을 담아두고 그 위치를 기록해 둔다.4 감정이라는 특성 자체가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러한 감정도 기억에 영향을 두 고 생겨나는 개개인의 반응이기에 양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정동적 존재라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가지는 기억은 인간의 기억과 저장 형태가 유사한 것이지 그것이 인간의 기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즉, 양의 기억은 인공기억이다. 인간과 같은 기억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기억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양의 감정에도 부여된다. 양이 인간과 정동하는 감정적 존재이나 그것이 인간과 같은가? 그 렇지 않다.


본고는 그러한 측면이 오히려 집중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양은 우리와 시작점에서는 다른 존 재이나 과정과 결과를 함께 만들어 간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인공존재들의 인간적 특성에 대해 서 시작점에서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정과 결과값이 시작점과 다르다면 우리는 그 모든 과정 을 누락하고 시작점만 응시할 것인가? 인공감정과 감정이 결합된 형태 인공기억과 기억이 상호보 완하는 형태가 이미 우리가 고도화된 기술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다. 양을 통해서 이해하 는 인간적 요소의 미묘한 관계는 새로운 테크노 존재들과의 관계값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가 진 인간의 관점을 해체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의 관점을 해체하는 방식은 우리가 살펴보는 정동적인 측면 이외에도 영화가 함 유한 큰 메시지이기도 하다. 영화 <애프터 양>의 세계관은 테크노사피엔스로 불리는 인공지능 로 봇이 일상화되고, 이 로봇의 제작사에 의해서 로봇이 가지고 있는 인간 소비자의 정보가 관리되는 세계이다. 고객정보를 관리하고, 로봇 제작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코어를 열어보는 것은 법 적으로 금지된다. 그러나 제이크는 양이 망가진 후 그의 코어를 열고, 양의 메인 프로세서 중에 스 파이웨어로 숨겨둔 기억 장치가 있음을 알아낸다. 제이크가 방문한 박물관의 연구원은 기억을 가지 고 있는 테크노사피엔스에게 큰 호기심을 가지고 양은 희귀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양의 기 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를 얻은 제이크는 양이 가족과 함께 정동하고, 기억하는 존재였을 뿐 아 니라 타자를 사랑하고 기억하고자 했던 로봇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현실에서는 인종 그 자체로 얽혀 있는 다인종이 인간 가족이라는 집단 아래 하나가 된 모습 을 보여준다. 그리고 양이라는 인공지능, 그리고 나아가 양의 친구인 에이다(클론 인간)까지 함유해 우리의 감정적 정동의 범위를 확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감정적, 정동적 교류를 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이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끼리 언어적 문화적 사회를 구성 하고, 정동적 교류를 하고 있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영화를 통해 납득하고, 테크 노 비인간과 인간의 교류를 통해 사회가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영화가 그리는 현실은 아름답고, 양은 무해한 존재로 비춰지지만, 실제로 미카는 학교에서 부모와 피부색이 다른 것에 질문을 받고, 제이크는 옆집 조지의 클론 자녀들을 기피한다. 아름답고 서정적 인 미래 사회에도 여전히 혐오와 편견 차별이 잔재한 모습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고 확신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사회에서 테크노 타자들을 정동적 교류의 존재로 가지게 되는 것은 어떠한 선언적 계기 또는 철학적 정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 다.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는 양의 나무 접붙이기 이야기와 노자의 인용을 통해서 다시 한번 드러난 다.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가 되어서 자라나고,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적으로 인간을 기준에 두고, 얼마나 인간 같은지 인간과 어떤 부분과 특성이 닮았는지 존재의 지위를 부여할 수 없 다는 것을 은유한다. 이미 그들은 우리의 삶에 들어오고, 이름이 부여되고, 기억이 쌓이며 대체할 수 없는 감정적 지위를 획득할 것이다. 또한 양은 중국 철학자 노자의 말을 인용하며 “애벌레가 끝 이라고 부르는 걸 세상은 나비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에서 실존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카이라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아무것도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There’s something without nothing).” 결국, 실존의 문제는 카이라에게도, 양에게도, 우리에게도 빈칸이 었다. 마치 양의 장례식처럼,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시간으로 흘러가는 영화는 현시대에 촉발되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질문들을 상기시킨다. 인공지능에게 향하는 인간에 요소에 대한 질문들은 결국 인간, 비인간, 인공지능 모두에게 남겨진 하나의 빈칸, 실존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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