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영화,
남한산성 [남한산성]=김훈의 소설,남한산성
남한산성= 물리적인 공간, 남한산성을 의미한다.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각색한 작품으로, 병자호란이라는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 인 패전 중 하나를 다룬다. 병자호란은 후금(청)이 정묘호란 이후 10년 만인 1636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사건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뒤 항복할 때까지 47일간 벌어진 전쟁이다. 조선은 오랑캐와 화친해 서는 안 된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실은 후금(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인조 정권이 집권이후 표면적으로 ‘친명배금’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후금에게 뚜렷하게 적대했던 사실이 없었던 상황1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후금을 ‘오랑캐’로 여겼고, 후금은 조선을 자신들에게 정복된‘신하’2로 여기는 시각을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정묘호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결국 병자호란의 발발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 세워진 영화 <남한산성>은 당시 ‘인조를 둘러싼 김상헌(척화파)과 최명길(주화 파) 두 신하의 이야기’3를 중심축으로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왜 그런 불안과 혼란에 빠졌는지를 이해하 기 위해서는 조선 조정 내부 시선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라는 메타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 다. 당시 청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조선은 250년간 유지해온 '명에 대한 충절'이라는 이념에 발목 잡힌 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스스로를 고립으로 몰아넣는 길이었다.
물론 당시 조정의 인물들이 이러한 국제 정세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한 국가의 신념 체계를 전환한다 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결단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이념에 뿌리를 두고 오랫동안 교육받아온 권력 계층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에게 명을 배반하고 청을 섬기는 것은 국가적 신념의 붕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은 각자 자신이 믿는 방식으로 조선을 지키고자 하며, 그들의 대립은 단 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닌, 삶과 죽음을 건 철학적 갈등이다.
황동혁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단순히 역사적 재현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 대 정치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절망적인 이야기에서 희망을 길어 올 릴 수 있는 시기는 선거철 밖에 없다. 절망 속에서 우리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나라를, 지도자를 바꿔야 한다. 이 같은 전략과 계획을 가지고 기획을 한 거다.”4라고 말한다. 이는 박근혜 정 부의 몰락과 이후 대선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하지만 탄핵과 탄핵 이후 예상 일정과 다르게 치뤄진 선거로 인해 영화의 개봉 전략은 통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2025년 지금 또 다른 탄핵 정국을 앞두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역사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기록된 현실을 토대로, 현재의 관객에게 역사 속 장면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며, 우리가 반복하지 말아야 할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영화는 포착할 수 없는 다층적인 역사를 물리적 시간으로 압축하며, 역사적 상상력과 기록 사이를 오가며 하나의 기억을 만들 어낸다. 이 기억은 정치, 외교, 경제라는 국가 단위의 운명뿐 아니라 개인의 삶과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점에서 <남한산성>은 단지 인조와 신하들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대장장이, 송파강에 서 살아가는 아이와 같은 민중의 삶을 비춰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은 역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 민중의 기억과 고통을 상상력으로 보완한 것이다.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민중들은 전쟁보다 더 참혹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김상헌의 『청음집』, 최명길의 『지천집』과 같은 기록은 철저 히 양반이나 국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기록되었으며, 민중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역사는 '삶의 기록'이다. 특히나 언어로 온전히 기록되기 어려운 ‘삶’을 기록과 증거로 다룬다. 삶이라는 신 체적 유한성과 시간성을 수행하다보면 누구나 이것이 얼마나 한계가 명백한 영역인지 어느 순간에는 체감 하게 된다. 그렇기에 언어로 온전히 기록될 수 없는 삶의 고통과 모순은 기록 속에서 종종 삭제되거나 왜곡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공개적 미디어로 구현하는 역사영화는 ‘누구도 증언하지 못한 시간’을 재현할 책임을 진다. 그렇기에 역사영화는 상상력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고통을 복원하고, 그들의 존 재를 인정하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실제로는 인조의 항복 이후에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이 칼로 배를 찔렀던 사건5을 김상헌이 칼로 배를 찌르고 세상을 떠난 것처럼 연출한다. 실제로는 김상헌과 정온 모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산성>은 스펙터클을 위 한 역사적 과장의 위험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층적인 시선을 통해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보여준 작품이다.
특히, 극중 최명길이 지속해서 ‘삶의 길’을 택하는 것과 김상헌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으로 대조되어서 보이는 선택은 작품의 러닝타임 2시간이 넘어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극 중 김상헌(김윤석)의 대사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그의 문장은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드러낸다. 새로운 삶은 단지 새로운 권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체제, 이념, 권력의 구조 안에서 어떤 새로운 삶을 꿈 꿀 수 있을까?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새로운 삶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저 다시 쌓아올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진정한 무너짐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시 작된다. 특히 이렇게 치열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어느 쪽을 택하던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의 역사는 민중과 왕 실 그리고 신하들 모두에게 처참한 현실을 안겨주었다. 누구도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던 현실에서 영화는 우 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반복하는가?우리는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가?
17세기를 그리는 영화 <남한산성>은 질문을 제기하는 역사영화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고, 현재로 하 여금 미래를 묻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가 가야 할 ‘삶의 길’을 다시 묻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를 이야기 하 는 학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영화관 밖에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라는 말이다. 이동진의 [영화는 두번 시작 된다], 김호영의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와 같이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질문을 제 기하거나,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침묵해 있던 관객들에 의해 영화가 다시 발화한다 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장이다. 흔히들 ‘좋은’영화를 말할 때 자주 사용되지만, <남한산성>의 경우에는 이 영화가 자꾸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우리가 여전히 질문에 적절히 응답하고, 다시 시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산성>이 비교적 자주 다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한국 영상 자료원, 영화 <남한산성> 황동혁 감독 인터뷰 https://www.koreafilm.or.kr/museum/theater/module/TI_00000036
한명기.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 조청 관계와 병자호란. 서울 : 동북아역사재단, 2020. 한명기 원작 정재홍 만화. (만화) 병자호란.하, 격변하는 동아시아, 길 잃은 조선. 파주 : 창비,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