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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Oct 29. 2019

10일간의 모니터 탈출

의도치 않았지만 10일간 모니터를 탈출했더니 생긴 일

나는 UXUI 디자이너다. 보통 IT 업계에 종사하지 않는 분들이라면 UXUI 가 뭔가요? 라고 되묻지만, 일단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니 잠깐 넘어가고 '하루종일 앉아서 컴퓨터로 일하고 모니터 보고 있는 직업'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사실 단순히 그냥 보는 것도 아니다. 작은 픽셀 하나, 선이 잘 이어져 있는지 꼼꼼히 봐야하고 어떤 색이 더 나을지 여러가지 컬러칩들 속에서 선택해야한다. 디자이너로써는 그렇고, 지금 있는 회사의 디자인팀장의 위치에서는 다른 분들의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도 해야하고 무언가 결정도 해야하고 스케줄링도 해야한다. 구구절절 길게 썼지만 결국 면밀하게 보아야하고, 무언가 신경쓸게 많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심지어 원하지도 않지만- 치밀하고 조금은 예민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1년 9개월 동안 좀 더 치밀하고 예민해지며 살던 중에, 갑작스럽게 해외출장이 결정되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하는걸 좋아했던터라 반가운 일이었다. 어릴 적 버킷리스트 중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어! 해외출장 가는 커리어우먼! 같은 바람이 있었던터라, 괜스레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멋진 커리어우먼과는 거리가 조금 멀지만 어쨋든 바라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니까.


그렇게 불현듯 9월 30일에 출국해서, 3일간 일하고 남은 기간 동안 여행을 했다. 고맙게도 회사가 연휴 사이에 휴가도 주었던 덕이었다. 3일간 일하는 것도 오프라인 행사다보니 의도치 않게 거의 10일 동안 컴퓨터나 모니터와 떨어져서 지냈다.


그렇게 늘 가까이하고 있던 기계와 떨어져 지내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니 몇가지 변한 점들이 있었다.


1. 당시에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컴퓨터가 없으면 곧잘 불편할 것만 같았는데, 간단한 길찾기 정도는 휴대폰으로 하면 되었고 업무관리 등도 출국하기 전 이슈를 만들어두고 갔던 터라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노트북이 필요할 것 같아서 들고갔는데, 10일 중에 노트북을 켠 날은 단 하루 뿐이었다. (짐이 엄청나게 무거워져서 그게 유일하게 불편했다. 내 15인치 구형 맥북은 너무 무겁다.)


2. 다시 모니터 앞에 앉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우습게도 다시 모니터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점이 이 앞이라는 것이 무척 미묘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떠나기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해야하는 것들이 참 많았다. 포트폴리오 만들기, 이력 업데이트하기, 글쓰기... 그런데 회사에서 늘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보니 퇴근 후엔 도무지 컴퓨터로 하는 일들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해야하는 일인데도 하기 싫었고, 그래서 무한정 뒤로 밀렸다. 해야하는 일들을 하지 않으니 또 스스로 스트레스 받고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3.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돌아오니 죽어있던 의욕이 조금 살아났다. 마치 처음 컴퓨터와 모니터를 접한 사람처럼 신기해졌다. 쉽게 글을 쓸 수 있음에 편리함을 느꼈고, 몇번의 클릭으로 이력을 업데이트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고마웠다. 덕분에 늘 미루어두었던 글쓰기도 지금 하고 있고 마음 먹은 김에 빠르게 발행까지 해보려 한다. 포트폴리오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아직 못했지만, 이력도 간단히 웹사이트에 업데이트했다. 퀘퀘 묵은 일들이 하나씩 쉽게 정리되어 가는 과정이 신기하다.


"모니터를 10일 동안 안봤더니 다시 모니터 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 처음엔 그렇게 말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점철되어있던 특정한 물건과 공간에서 벗어난 것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완전히 다른 풍경, 내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에어비앤비 숙소, 심지어 언어조차 다른 곳에서의 10일. 누구나 가끔 리프레시가 필요하지. 하고 말하고 그것에 동의해왔지만 이번처럼 그 말의 뜻을 크게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무딘 사람이라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 깨닫는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이번에도 모르고 있었는데, 10일 동안 모니터를 탈출하고 보니 알겠다. 그 동안 내가 해야할 일을 못했던 건 내가 게으르거나 무신경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임을.


혹여나 떠나기 전의 나처럼 나는 왜 해야할 일도 안하고 이러고 있지. 하는 마음이 든다면 완전히 다른 곳에서 머물러보기를 추천한다. 내가 가까이 하던 것들을 최대한 멀리하고 머리속과 마음을 환기시키는 것. 시간, 공간, 비용의 제약으로 마냥 쉬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며칠 그렇게 쉬고 돌아온 후의 효율성은 그 어느때보다 큰 것 같다.


나를 위한 휴식의 시간을 줄 것. 너무 바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세상과 섞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안에서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선 거기서 빠져나와 홀로 머무르는 시간도 필요함을 이번에 크게 배웠다.


물론 귀국 후 돌아온 회사는 나를 다시 화나게 하고, 그 안에서 나는 다시 치밀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머리와 마음 모두에 20프로 정도의 여유공간은 만들어두지 않았나 싶다.


그 마음을 유지하고 여유공간을 늘 보존하기 위해서 이 글을 첫 글로 쓴다. 잊을 만하면 보고 다시금 내게 휴식을 줄 수 있는 티켓으로 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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