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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에 Nov 26. 2019

어쩌다 디자이너가 됐을까

디자이너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야근, 박봉, 을의 위치.


대학시절 내가 생각한 디자이너의 모습은 딱 그러했다. 과 활동을 폭넓게 한 것도 아니었지만 졸업 후 취직한, 또는 그런 선배들과 친한 친구들의 입에서는 어디 취직한 선배 야근 엄청 한대, 돈은 얼마 못 받는대 등의 정보들이 간간히 흘렀고 말없이 나는 그런 정보들을 가만히 듣곤 했다.

굳이 취직을 한 선배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너무 분명했다. 일의 강도는 세고, 그에 대한 급여는 적고, 늘 을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직업군. 이미 학부생을 지내면서 맛보았던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잖아. 교수님은 곧잘 그런 피드백을 내놓았다. 물론 학부생인 나보다야 훨씬 오래 디자인에 몸담고 계셨고, 그로 인한 혜안 같은 것도 분명 있었을 테다. 그러나 디자인을 처음 접하는 나에게는 퍽 가혹한 일이기도 했다. 일주일을 밤잠 설쳐가며 수많은 과제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 결과가 '이게 아니다'라는 답을 받아들이는 건 졸업하기 전까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 답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는 친절하게 이 부분이 어떠하니 이렇게 고쳐보지 않겠니? 하는 다정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디자인을 배우는 학부생에게 꽤나 거칠고 날카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교수님마다 다 다른 스타일로 배움을 주셨지만.)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그저 '재밌어'보여 택했던 디자인의 길이 실제로는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결국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끝과 그 끝이 언제나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심지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따르다 보면 디자이너로써의 '내 작업'은 온데간데없고 어정쩡한 결과물만 남아 어디에 내보이기도 부끄러운 작업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학부생 때 생각했다. 아, 디자이너 하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일은 모른다더니. 처음에는 짧은 시간제 알바 같은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기로 하긴 했지만 근무시간은 1시부터 6시까지였고, 그마저도 일이 있다면 퍽 자유롭게 일찍 오고 늦게 퇴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봉이라 느꼈던 디자이너의 급여 또한 당시 내 기준에서는 나쁘지 않게 책정되어있었다. 이 정도 시간을 근무하고 이 정도 급여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충분히 할 수 있는 돈과 시간이 확보된다고 느꼈다. 그렇게 졸업을 하기도 전에 일을 하기로 결정했고 4학년 겨울방학과 동시에 직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첫걸음을 뗀 디자이너로의 삶이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그 시간의 사이에서 나는 많이 바뀌었다. 첫째로 디자이너는 하지 말아야지 했던 생각과 다르게 너무 디자이너로 충실히 살게 되었고, 둘째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포기하게 됐다.(포기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면 너무 길어져서 따로 쓰겠다.) 포기해야겠다 확정한 순간은 과거에도 슬펐고 지금도 슬프지만, 하고 싶은 걸 포기하게 되었다고 해서 당장 조건 좋게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때려치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계속 다녔다. 어떻게 보면 미련하고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회사가 커지고, 근무시간이 길어지고, 팀원이 생기고 팀장이 되고... 생각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것들이 불쑥불쑥 내 손에 쥐어졌다. 그렇게 나는 영락없이 '디자이너' 명함을 가진 디자인 팀장이 되어버렸다.


디자이너로 일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의문들을 많이 가지게 된다. 정말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게 맞을까? 가끔 일하고 있는 나를 보면 역시 소질이 없는 것 같아. 하며 우울해지다가도, 어느 옛날에 정리해둔 프로젝트를 보면 와 나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싶은 기쁨이 차오르기도 한다. 몇 번의 그러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나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며 스스로 위안을 하고 다시 마우스를 잡는다.


늘 배워야 함을 끊임없이 느낀다. 세상에 쏟아지는 눈부시게 좋은 작업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이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단순히 레퍼 상에서 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하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느낀다. 각자만의 강점이 다 너무 분명하고 나는 또 어떤 부분에서는 참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고서. 어쩌다 시작하게 된 디자이너지만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즐기며 해볼까 했던 것들에 욕심이 든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되어버린 팀장의 위치에서 팀원분들이 나보단 맨땅에 헤딩을 덜 했으면 하는 마음에 배울 욕심은 자꾸만 늘어간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결과는 내가 이 길을 '싫어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정말로 싫었다면 학부생 때 전과를 할 수도 있었고, 하고 싶은 걸 포기하게 되었을 때 회사 역시 그만두고 떠날 수 있었는데. 사실 내게 디자인은 재미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로 견고함을 쌓고, 단지 '예뻐서'가 아닌 그래야만 하는 이유들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그 모든 과정들이 내게는 즐거움이고 재미였다. 그래서 덜컥 선택한 4년의 학부생 시절과, 흘러가는 대로 놓아둔 2년의 실무 생활 속에서 방향을 돌리지 않았던 게 아닐까.


디자이너가 되기 싫었던 그 마음은 사실 내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게 싫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즈니스에 있어서, 프로덕트에 있어서 디자인은 사소한 부분일 수 있지만 시간을 충분히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물론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각각의 가치가 있다.) 내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 때론 누구도 그 노력과 가치를 알아주지 않기도 했다. 그런 시간마다 회의감이 들고 답답했지만,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란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로 산다. 비록 이리저리 치이고 디자인이 그저 예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냐 오해를 받아도. 당장 오늘까지 만들어주세요 하는 무리한 요구와 온갖 여러 디자인 업무를 아우르게 되더라도. 디자인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믿음이 부서지기 전까진, 아마 디자인을 계속 품고 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하지 않으려 했던 디자이너를 하면서, 우습게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건 꽤나 잘 걸어온 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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