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하듯

by 노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희는 OOO라고 하는데요"
아아, 한참 전에 이력서를 냈던 회사다. 아, 이력서를 낸 게 언제쯤이었더라. 일단 면접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짧은 통화였지만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편안했다. 하지만 나 이제 더 이상은, 목소리 같은 것에 속지 않아.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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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주째 이력서를 내지 않았다. 언제부터지... 하고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떠오르는 장면들이 몇 개 있다. 카페 알레르게에서 많이 울어버린 날. 그날 내 안에 뭔가가 사락사락 녹아버렸다. 내 입에서 나온 말들에 내가 더 충격을 받은 듯, 더 이상 이력서를 내는 것이 다소 의미 없이 느껴졌다. 그럼 그다음에는 뭘 해야 할까. 이력서를 내지 않고 '취업 준비'라는 명목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건 또 무얼 해야 할까. 나라면 분명 그렇게 고민했을 것 같은데, 더 이상은 고민이 잘 되지 않았다. 그즈음, 많지 않은 퇴직금을 몽땅 찾은 것도 다만 몇 달이라도 더,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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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작성했던 이력서와 회사의 공고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었다. 회사 공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서류 접수 마감일과 서류 합격 연락일, 면접일, 결과 발표일이 기재되어 있었다. 기재된 날짜에 연락이 왔고, 면접 약속을 잡은 거였다. 굉장히 사소한 거지만 좋았다. 어떤 회사에겐 당연한 거겠지만, 정신없이 면접을 보고 사람을 뽑는 회사는 막상 이런 사소한 부분이 쉽지 않다. 예전 회사에서 면접을 꽤 많이 봤다. 아무리 적게 꼽아봐도 100명 이상. 100명이 뭐야. 직원이 워낙 자주 그만뒀기 때문이기도 했고, 감사히도(?) 한순간도 쉬지 않고 회사가 끊임없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은 만들려면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일손이 항상 부족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뭔가 늘 절박한 마음으로 면접을 진행했다. 입사했다가 금방 그만둘까, 미리 회사의 부족한 점을 더 적나라하게 말할 때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는 정말 좋은 회사인 양 말할 때도 있었다.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만. 흐흐. 모르겠다, 나는 어떤 면접관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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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기적으로 이력서를 넣는 구직자가 되고 나서 몇 번의 면접을 봤다.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면접관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됐다. 하나같이 새로운 경험이다. 앞에 앉아 있는 지원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춰 질문하는 회사가 있었다. 회사에 대해 알려주고 회사에 맞출 수 있는지를 주로 확인하는 회사가 있었다. 지원자의 과거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가 있었고, 지원자의 현재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도 있었다. 기타 등등, 회사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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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회사에 갔는데, 집에서 나와 회사에 들어가기까지 고작 30여 분이 걸리는 걸 알고 놀랐다. 너무 가깝잖아. 이미 좋은 기분으로 면접이 시작되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편안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성의 있는 면접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내 과거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다. 퇴사하고 지금까지 뭐 했냐, 왜 퇴사했냐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 회사였다. 좀 신기했다. 그 질문이 뭐가 어때서가 아니라 그냥, 나의 ‘지금’을 묻는 질문들이 새삼 아주 편안했다. "근데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요." 우대 조건 중 하나였던 영어 수준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더니 면접관이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모든 걸 잘하시는 분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영어 작업은 또 영어 잘하시는 분들이 하면 되니까요." 아, 지난 면접에 나를 끝까지 몰아붙이고, ‘하,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되게 애매한 포지션인 거 알아요?’라고 했던 면접관이 생각났다. 그 타이밍에 얼굴에 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부어버리는 상상을 (이제 와서) 해본다. 결과야 어쨌건, 오늘 참 좋은 면접이었다.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다. 역시.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하라 더니. 면접은 또 다른 면접으로 치유해야 하는 거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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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마지막 면접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