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자 강릉 탐방
외지 사람이 강릉에 가려면 제일 먼저 머물 곳부터 정해야 한다. 강릉에 맨 처음 왔을 때 숙소가 포남동에 있었다. 첫 단추를 이곳에서 끼운 탓에 계속 숙소는 포남동이었다. 강릉 여행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굳이 꼽지 않는 동네, 포남동은 내가 강릉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다.
포남동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아마 [엄지네 포장마차]와 [빵다방] 아닐까. 사람 많다는 얘길 하도 들어서, 두 곳 모두 지레 겁먹고 안갔다. 줄 서서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라. 그 덕에 숙소에서 다른 게스트들이 엄지네 꼬막을 포장 해와서 먹는 걸 보기만 해야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까치칼국수]에서 장 칼국수를 처음 먹어 봤다. 저녁 시간인데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역시, 가게를 잘 골랐다. 빨간 국물의 칼국수. 칼국수 안에 냉이가 들어가서 맛이 독특하다. 메뉴에 있는 고기 김밥도 맛있어 보이길래 한 줄 시켰다. 김밥을 시키기 전, 너무 많을까 싶어 잠깐 고민했다. '남기더라도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하고 시켰는데, 전혀 남기지 않았다. 괜히 고민했다. 칼국수도 고기김밥도 맛이 참 깔끔했다.
밥을 먹고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강릉시립도서관. 강릉시의 시립 도서관이 포남동에 있다니! 대단해 보이지 않는(!) 동네였는데 이곳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무려 시립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는 동네였다니. (갑자기 서울시의 시립 도서관은 어느 동네에 있는지가 궁금해져 검색을 해봤다. 용산구 후암동, 남산 기슭에 있는 '남산도서관'이 서울시립도서관이라고 한다.) 특별히 시험기간이 아니었는데도, 도서관 안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슬슬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강릉 도서관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서가에 만화책이 많다. 혹 시립도서관만 그런 건가 했는데, 나중에 교동 모루도서관을 가봤는데, 그 곳에도 만화책이 꽤 많았다. 아, 그래서 학생들이 많은 건가.
만화책이 꽂혀있는 서가 쪽으로 가보니 사이사이 좀 으슥한 곳마다 학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도 읽고 싶은 책을 꺼내와 읽기 시작했다.《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처음에는 '이게 뭐야 유치해'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참 모를 일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도 있긴 하다. 어떻게 사느냐의 방법은 순간순간 변할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할 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열심히, 제대로 살아내는 그럴듯한 존재도 좋지만 나답게 최선을 다해 사는 존재로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쓸모를 고민하기보다는 나 답게를 고민해보자고, 또 새로운 고민거리를 떠안고 도서관을 나왔다. 좋은 시간이었다. 도서관에서 만화책은 대여가 불가하다.
포남동 주택가 사이, 오고 가면서 슬쩍슬쩍 들여다봤던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호스트 말로는 생긴지 얼마 안 된 포남동의 힙한 공간이라고 했는데, 운 좋게 숙소와 가까운 골목에 카페가 있었다. [웨이브라운지]
들어가자마자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에는 빛이 깊게 들어오는 넓고 깨끗한 창이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넓은 공간은, 대강 둘러봐도 신경 써서 꾸민 것이 느껴졌다. 음료를 시키고,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봤다. 오, 읽고 싶은 매력적인 책들이 눈에 보인다. 신간들도 꽤 있었다. 생긴지 얼마 안 된 곳이라더니, 아직 손님이 많지 않은 덕에 시끄럽지 않다. 음악도 좋고, 공간은 넓고, 천장도 높고, 창은 크고, 적당히 어둡고. 이 정도면 거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얘기다. 음료 한 잔을 더 시켜 마실 만큼 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깥에 슬쩍 어둠이 내리자, 카페 안은 또 다른 분위기로 변했다.
이 시간도 근사하네. 내일 또 올 거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혼자 비장하게 다짐하며 카페를 나왔다.
근처를 어슬렁 어슬렁 걷다가 학교가 보이길래 담장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담장 끝, 교문이 열려있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는 운동장 너머로 어김없이 무성한 소나무 숲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핑크빛 하늘,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금 보니 꽤 쓸쓸한 풍경 같기도 하지만, 자주 볼 수 없는 하늘색이 예뻐서 그네에 앉아 대롱대롱 몸을 흔들며 해가 넘어가는 걸 구경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일어나 나왔다. 학교 앞 오래된 분식집, 조그만 문방구를 지나 집으로, 아니 숙소로 갔다.
다음 날, 약속대로 다시 [웨이브라운지]에 들렀다. 이날도 해가 좋은, 낮 시간을 종일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바깥이 어둑해질 무렵 골목을 걸어 내려와 저녁을 먹었다. 새로 생긴 분식집, [포동김밥]. 진미채김밥이 제일 맛있었다.
포남동에 머무는 동안, 몇 번쯤 호스트와 함께 강아지 산책을 했다. 해가 지면 목줄을 채워 강아지를 데리고 포남동 골목 골목을 다녔다. 가끔 호스트가 내게 목줄을 잡게 해줬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어, 산책도 처음이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점점 흥분한 채로 뛰듯이 걷다보면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귀여운 목소리로 강아지에게 인사를 건네고, 우리에게도 너무 쉽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 만난 세계였다.
며칠 전에 들춰봤던 책이 생각났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동네 사람들 중에 나는 몰라도 내 반려견을 아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반려동물을 한번도 키워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운 좋게도 며칠 만에 그 기분을 조금 맛봤다. 이 곳에서 해보지 않았으면, 어쩌면 평생 해보지 못했을거다. 여행 중 강아지 산책이라니. 이제와 생각해도 재밌는 경험이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여행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그 순간만큼은 서울의 우리 동네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밤늦게 집에 들어갈 때, 사방이 깜깜한 길을 걸어가다 집이 가까워지면 점점 익숙한 풍경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진다. (그 순간이 더 위험한거라고도 하지만.) 강릉에도 그랬다. 저녁마다 돌아갈, 익숙한 곳이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리고 안심이 됐다. 하루 종일 낯선 곳을 걷다가 숙소 근처에 올 수록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째 강릉 이 동네, 서울의 우리 동네랑 느낌이 비슷하다. 아파트보다는 오래된 주택이 많고, 힙하고 멋진 건물도 딱히 없는 조용한 동네.
포남동, 강릉에 우리 동네라고 부르고 싶은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