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02-03의 기록
2월에 결제해뒀던 추석 황금연휴가 퇴사 여행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시작은 우연히 보게 된 숙소 사진이었다. 사진 속 목재 건물에 누워서 바깥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제대로 된 힐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 당시에는 오직 그곳에만 진정한 힐링이 존재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몇 년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던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충동적으로 황금연휴 고가의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꿈의 숙소를 예약하고. 동행과 나는 아무런 계획도 일정도 짜지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출발하게 되었다. 숙소에 대한 기대 한가득, 떠난 다는 것도 퇴사도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 상태로.
이번 추석 연휴는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이 기록적으로 많을 거라고, 하도 떠들어대서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저녁으로는 한식을 먹었다. 여행을 할수록 '짐을 줄이자'는 생각은 또렷해지고 실제로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이번에도 가뿐히 19.2kg의 캐리어를 끌고 와버렸다. 커다란 짐이 여행에 서툰 나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벼워지겠다고 때때로 떠나오면서도 손에 쥔 묵직함은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일상의 무게 같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배낭을 메고 온 동행은 훨씬 더 그럴싸해 보였다. 나도 배낭을 메볼까, 하다가 속으로 혼자 웃었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그대로 19.2kg짜리 배낭을 만들어 올뿐일테니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오랜만이다, 수속을 마치고 앉아서 잠깐 생각했다. 함께 여행한다는 것이 어떤 거였더라.
1시 5분, 새벽 비행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뒤척 뒤척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5시쯤 방콕 돈므앙 공항 도착했다. 퇴사를 하게 되는 바람에 갑자기 돌아오는 날짜를 연장하게 됐다. 내리자마자 비행기 표부터 변경했다. 처음 해보는 이 떨리는 일을 영어 잘하는 동행 덕분에 무사히 완료. 맞다. 함께 하는 여행이란 게 이런 거였지. 내가 모든 걸 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 긴 경유 시간을 혼자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 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이때부터가 달디 단 라테의 시작이었다. 태국 카페의 음료는 대부분 달디 단 시럽을 넣어 줘서 주문할 때 꼭 '노- 슈거'라고 미리 말해야 하는데 자꾸 잊어버려서 초반엔 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했다.
타이라이언을 타고 1시간 15분 비행 후 도착한 치앙마이 공항은 아담했다. 꼭 지방의 터미널 같이. 수속을 금방 마치고 나와 보니 바깥에는 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역시. 우기라고 하더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공항에서 연결해준 택시를 타고 바로 빠이행 승합차를 탈 수 있는 곳(google map에 aya service center 검색)으로 갔다. 기사님께서 다소 비싼 것 같은 택시비를 불렀으나 일단 처음이니 바가지도 좀 써주는 것이 여행객의 예의라며 흥정 없이 택시에 올랐다.
센터에 도착해 표를 샀다. 우리가 탈 수 있는 버스는 3시간 뒤. 간단히 요기를 하기 위해 나섰다. 숙소 외에 아무것도 알아 온 것이 없었다. 교통편도 그랬다. 치앙마이에서 빠이까지 이동하기 위한 다양한 선택지 중에, 사실 우리는 경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다른 방법에 비해 꽤 비싼 경비가 들지만 살면서 경비행기를 탈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공항에 내려 물어보니 그 비행기 노선은 없어졌단다. 오토바이는 면허가 없으니 애당초 무리고, 그렇다면 남은 건 승합차뿐이었다. 승합차 콜. 어차피 우리는 늘 상황에 맞는, 할 수 있는 선택을 할 뿐이다.
뜬금없지만 근처 쇼핑몰에서 피자를 먹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길에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는 커피 트럭을 발견했다. 오예 커피 타이밍. 도로 옆, 차가 지나가면 작아졌다가 차가 멀어지면 선명해지는 음악 소리가 기분 좋았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바람이 살랑 불어오고 그 바람에 이름 모를 이국의 나무들도 함께 살랑댔다. 분위기에 취해서 당연히 노-슈가를 잊어버린 탓에 나는 또 달디 단 라테를 마셔야 했다. 그럼 뭐 어때,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때 흘러나오던 스탄 게츠는 여행 내내 나와 함께였다.
우리가 탄 승합차는 승객을 꽉 채우고 약속된 시간을 맞춰 바로 출발했다. 우리 앞 차는 늦게 온 손님 탓에 거의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을 했으니, 우리는 동승 운(?)이 좋았다. 차가 출발하기 전 우리에게 '앙뇽하세요'를 남발하던 넉살 좋은 기사님은 763번의 커브길을 가면서도 누군가와 끊임없이 통화하며 여유롭게 한 손 운전을 했다. 이걸 프로페셔널이라고 해얄지.
빠이까지 가는 3시간의 커브길은 어떤 말로도, 사진으로도 전할 수가 없다. 절대적으로 직접 봐야 한다. 뒷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승들을 흔들어 깨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풍경 좀 보라고, 지금이 잘 때냐고. 3시간, 763번의 커브길, 누군가는 멀미약을 먹어야 한다는 그 빡센 길을 기꺼이 또 경험하고 싶었다. 그저 남은 선택지를 고른 것뿐인데 이런 예상치 못한 기쁨이 있었다. 퇴사라는 선택은 또 어떤 예상치 못한 기쁨을 가져다줄까나. 끝없이 펼쳐지는, 숨 막히는 초록의 향연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여긴 사랑하는 사람이랑 다시 와야겠다. 절로 사랑이 피어날 것 같은 장면들이 이어지고, 친구와 나는 계속 끙끙 앓았다. 아 앓다 죽을 빠이여.
퇴사 첫날이자 여행의 첫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