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03의 기록
빠이 메인 스트리트에 발을 내디뎠다. 하. 분위기 너무 좋은데. 해가 넘어가며 환상적인 색을 만들고 있는 하늘 아래로, 노점상들이 하나 둘 노란 조명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거리를 편안한 차림으로 거니는 여행객들과 멍뭉이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하는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이곳이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렸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기 배낭 여행자들이 지금의 빠이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고 한다. 천국이 아니더라도, 최고가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우리에겐 지금이 첫 빠이니까.
잠깐 메인 거리를 어슬렁 거린 것뿐인데도 특유의 무드 덕에, 당장 코끼리 바지를 사 입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몇 군데 상점을 뒤적였으나 19.2kg의 캐리어를 들고 하는 아이쇼핑에 금방 피로가 몰려왔다. 게다가 어느덧 집 떠난 지 24시간, 내내 이동으로 꽉 채운 하루였으니 일단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에 가서 짐을 풀기로 했다.
한눈에 반해 숙소를 찜해두고, 여행을 기다리는 동안 애인 얼굴 들여다보듯 숙소 사진 들여다본게 벌써 수개월째, 오매불망이 따로 없네. 메인 도로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 마을로 부터 똑 떨어져 있는 위치. 바이크를 이용할 수 없는 우리에겐 여러 가지로 불편한 곳일 수 있지만 우리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해. 각자의 여행 스타일이 있으니(메인 스트리트에 쎄고 쎈 게 관광객 대상 택시 가게이므로 택시로 이동하는건 전혀 걱정할 것 없다).
등불 하나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헛. 생각보다 조금 더 외진 곳에 있긴 했다. 어느새 주룩 주룩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니, 도착한 숙소의 첫인상은 어둡고 으슥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호스트가 나와서 반겨줬다. 게스트하우스+카페+작업실+아트샵을 같이 운영하고 있는 아티스트 겸 호스트. 짐을 풀고, 씻고 나니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저녁을 먹지 못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요리를 해주었다(물론 유료). 배불리 먹고 디저트로 내준 과일까지 먹고 나서 잠이 들었다. 내가 들어본 중 가장 큰 풀벌레 자장가를 들으면서.
복층으로 되어 있는 숙소는 천장이 높고, 한쪽 면 전체가 창문으로 되어 있어 바깥 풍경을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슬슬 해가 떠오를 때의 어스름한 새벽빛이 큰 창을 통해 들어올즈음 부스스 일어났다. 곧 눈부시게 비추일 해가 나오기 직전, 고요한 빛. 잠에서 덜 깬 채로 마주한 황홀한 새벽 풍경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진부터 찍어댔다.
다시 침대에 들어가 뒹굴대며 조금 더, 조금 더 새벽의 몽롱함을 만끽했다. 밖이 밝아오는 걸 모를 수 없게 끔 사방이 창이었다. 하루의 시작에 이런 푸르름을 눈에 담으며 시작할 수 있다는 건 사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머무는 동안 사치스럽게 누리자, 싶어 일어나면 늘 창부터 활짝 열었다. 그 덕에 풀벌레 서라운드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이 또한 황송한 자연의 일부.
이미 잠에서는 깨버린 터라 산책을 하기로 했다. 어젯밤엔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한 정원과 숙소 곳곳을 둘러보았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초록. 어디에 가져다 대도 그림이라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어젯밤 내린 비 덕분에 마당에 아무렇게나 플루메리아 꽃송이가 툭툭 떨어져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찌르르 풀벌레 소리, 청아한 새소리, 쪼르륵 물소리가 더해진다. 코 끝으로 싱그러운 풀 내음이 스치고, 아직 습해지기 전 찬 공기가 살갗을 감싼다. 한마디로 겁나 쾌적하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산책길.
문 밖은 바로 논이었다. 시야가 탁 트인다. 어젯밤에 저 논길을 따라 들어온 거구나. 밤이 되면 너무 깜깜해져서 여기가 논인지 바다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사실 어제 밤 이 낯선 길이 꽤 무서웠나 보다. 어둠이 이어지는 창 밖을 보면서 '이렇게 끌고 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 하나 죽여도 아무도 모르겠구먼'하는 망측한 생각까지 했던 걸 보면. 그리고 이건 부끄러워서 동행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내가 얼마나 쫄아 있었냐면. 씻으러 들어간 샤워실 벽에 빨간 자국을 보고 너무 놀라서 손으로 문질러 봤다. 혹시 피인가 하고(다행히 아니 당연히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자국이었다). 그런데 어머나, 원래는 이런 풍경이었구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아직 여린 빛깔의 하늘과 풍경 사이로 부릉- 바이크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새벽에 나와 혼자 휘적휘적 걷고 있는 나를, 어느 누구 하나 흙바람을 일으키며 쌩하니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큰 길까지 걸어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숙소, 그 앞에서 발이 딱 멈췄다.
아, 아까 나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건물 외벽의 그림을 발견했다. 자리에 그대로 서서 몇 초간 그림을 보고 있는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와 고양이의 눈으로.
life is full of beauty open your eyes.
서울에서의 지긋지긋한 회사 생활을 끝내고 온 퇴사 여행. 회사 안에는 내게 아름다운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남아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회사는 그만두면 그만이지만, 나는 내가 걱정됐다. 바짝 메말라서 아무것에도 감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봐, 사소한 것에도 화를 내는 조금의 여유도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봐, 하루 종일 어떤 것을 봐도 웃지 못하는 사람일까 봐. 그런데 여전히 감격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보였다. 정원에 떨어진 한 송이 꽃에 설렜다. 다행이다. 안심이다.
모닝 라테를 방으로 주문하고 정원에 떨어진 꽃을 주어서 신나게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의 모든 커튼을 걷고 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까보다 더 커진 풀벌레 소리, 아침 냄새.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빈백에 몸을 쑥 밀어 넣은 채 커피를 마셨다. 환상이고만. 휴가 같다 그야말로.
사방으로 아주 그냥 끙끙 앓을 풍경들이다. 사실은 대단할 것도 없지만, 그냥 내 마음이 아주 활짝 열린 걸 게다.
문을 열어 놓았더니 달팽이가 방안으로 기어 올라왔다. 밤엔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 천장에서 가끔 툭하고 떨어지는 도마뱀, 윙하고 지나가는 모기들, 잘못하다가는 머리에 찐득하게 걸려버리는 거미줄. 분명 익숙한 것들은 아니지만 싫지만은 않다. 내가 좋은 곳, 나만 좋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더구나 여긴 원래 얘들 집이다. 우리 같이 좋자, 나 잠깐 놀다 갈게, 인사를 건네는 마음으로.
출발할 때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엔 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괜찮아지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리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숙소 어딘가에 적혀 있던 문장으로 마무리해야겠다.
“FUCK ALL THE PERFECT PEOPLE.”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 천국이 아니어도,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은. 이 곳, 빠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