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iness is here, 빠이

2017. 10. 04의 기록

by 노니


한 낮의 빠이 메인스트리트는 조금 휑한 느낌이었다. 길 위에는 바지런한 동양 관광객들만 듬성듬성 걸어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길가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파인애플 볶음밥, 카오소이, 팟타이, 그리고 태국 맥주. 둘이 가서 메뉴 3개를 시키고 맥주까지 마셔도 우리 돈으로는 12000원 남짓. 동남아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터라 태국의 싼 물가는 번번히 행복 그 자체였다. 돈을 지불하고 나서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를 계산하고나면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몰려왔다.


빠이는 실내에 에어컨이 있는 가게를 거의 볼 수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에어컨이 돌아가는 편의점은 사람 뿐 아니라 개들에게도 참 반가운 곳인 듯, 편의점 자동문 앞에 드러눕거나, 심지어는 편의점 안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있는 것도 낯설지 않았다. 직원도 손님도, 누구도 개를 내쫒지 않고 되려 곤한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건너다니는 건 꽤 익숙한 광경이었다. 빠이의 개팔자가 진짜 상팔자로구나.

밥을 먹었으니 커피를 한잔 마시려고 구글맵을 검색했다. 세상은 넓고 가고 싶은 카페는 많다. 나는 식당을 실패하는 것보다 카페를 실패하는 것이 더 속상한 사람이니까 최대한 신중하게 선택하고 거리를 확인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서 걷기로 했다. 전투력이 필요한 한낮이므로 한껏 쵸코 쵸코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장전하고 걷기 시작!





메인 스트리트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접어드니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소박한 시골마을. 낡은 집의 담벼락 아래는 태어나 처음 본 꽃들(뭐 한 두 개이겠냐마는)이 피어있었다. 가장 많이 심겨져 있던 꽃 중에 하나는 다오르앙(=만수국, 메리골드)이었는데, 이 꽃이 푸미폰 전 국왕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들었다. 단순한 존경을 넘어선, 나의 눈에는 신기할 정도로 태국인들은 푸미콘 전 국왕을 사랑했다. 전 국왕에 대한 충성과 감사의 표시로 가정이나 공공장소에 메리 골드를 심는 캠페인까지 있었다는걸 듣고 나니 더 자주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때가 장례식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으니 더 많은 곳에서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활짝 피면 꽉 들어찬 꽃송이가 풍성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역시 사람이 있는 곳에 꽃도 많다. 마을로 들어오니 사방이 꽃 천지다. 매달린 꽃도 바닥에 뒹구는 꽃도 그림이었다.


이게 메리골드입니다




빠이는 도보 여행자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바이크로 다니고 있어 모두 우리를 휙휙 지나쳐 갔다. 택시 탈 껄 괜히 걷기 시작했나 싶을 무렵, 모두가 휙휙 지나가는 도로 옆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내 스타일의 잡화점이 있었다. 가려던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들어가자.


입구의 잡화점을 보고 들어갔더니 한쪽에는 해먹이 걸린 원두막이 보인다. 일단 두고 조금 더 기웃기웃 안쪽을 정원을 향해 들어가는데 마치 “여기 누구 안계세요?”하고 인기척이라도 하고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때, 우리를 맞아주는 흑판의 글씨가 보였다.



오 마이 갓.

작은 정원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정신 못 차리고 사방의 사진을 찍어댔다. 조금 더 둘러보니 이 곳은 잡화점 말고도 카페,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나신 주인 아주머니는 화장기 없는 얼굴,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에 편안한 앞치마 차림으로 호들갑스럽지 않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고민할 것도 없이 여기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구글맵에 찍은 카페에 가려고 30분을 걸어왔으나 그게 무슨 상관. 여행에는 항상 계획보다, 지금 지금 가고 싶은 곳이 먼저다. 원두막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삐걱 삐걱 소리가 나는 낡은 오두막에서 각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나는 해먹에. 오두막 한 귀퉁이에 매달린 낡은 스피커에서 지직 지직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감을 푼 듯한 색감의 그린티와 타이티가 나왔다. 그 위에 버터플라이피 한 송이씩.



발 밑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해먹에서 느껴지는 아주 완만한 리듬감에 스르르 저절로 눈이 감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뭇잎으로 엮인 지붕이 걱정될 만큼 한참동안 비는 계속되었다. 얼음이 녹아 색이 옅어진 타이티를 한 모금 들이키고, 여전히 해먹에 드러 누운채로 비를 구경했다. 음악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빗소리를 감상했다. 지금까지는 카페에 앉아서 보는 비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해먹 위에서 감상하는 비가 최고로구나.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마음 속에 차올랐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가 잦아 들고, 곧 다시 나타난 햇빛은 아까보다 좀 더 생생하고 상쾌했다. 습기가 쪼옥 빠지고 나니 같은 더위인데도 참 사랑스럽다. 대지를 달구며 내리쬐는 미친듯이 뜨거움이 아니라 눅눅함을 바짝 말려줄 청명함, 같은 햇빛이지만 기분이 달랐다.

충분히 쉬고 만족스러운 쇼핑을 하고 난 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갔는데 카운터 옆 흑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OPEN : When I'm ready

CLOSE : When I've had enough





이 곳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 유난히 내 눈에 자주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HAPPY’ 이곳은 행복이 무엇일까, 질문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퇴사 여행의 시작을 이곳에서 할 수 있다니 행운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아닌 '나'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내 속도를 생각하고, 내 충만함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빠이가 빠른 속도로 좋아졌다. 100%의 공간에서 나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가봐야지 하며 찾아간, '원래 가려던 카페'는 문이 닫혀 있었다. 사진 속에서 봤던 카페의 예쁜 앞마당에서는 조그만 남자 아이가 혼자서 축구공을 차며 신나게 놀고 있었고, 손자와 함께 나와 있던 할머니가 우리에게 뭐라고 뭐라고 태국어로 말을 건냈다. 여기 오늘 문을 안 연다는 건지, 여기 이제 장사를 안한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웃었다. 이게 여행이지 뭐.


근처 베지테리언 식당에서 대충 한 끼를 먹고 나와 입안 가득 향긋한 풀 내음을 담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 옆 오두막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다. 아까 우리가 누워있던 오두막 위에 주인 아주머니가 편하게 앉아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아주머니께서는 활짝 웃고 계셨다. Happiness is here. 30분 넘게 걸어 찾아온 카페가 문이 닫혔어도, 하루 종일 손님이 우리 둘 뿐이었더라도, 우리도 아주머니도 마음껏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비가 한바탕 훑고 지나간 맨 얼굴의 빠이, 개운하게 씻긴 하늘과 들판의 말간 얼굴에 우리는 자주 멈춰서서 감탄했고 그때마다 셔터를 눌러댔다. 나중에 사진첩을 열어보니 풍경 사진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며 충북 음성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이런 사진들이.



누군가에게는 그게 그거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조금만 빛이 달라져도, 구름 모양이 바뀌어도 다시 또 눈앞의 풍경을 찍었다. 아이폰 따위가 조금도 담아낼 수 없는 풍경인 것을 알고도 이 순간을,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계속 찍었다. 번번히 감격하며. 우리는 분명히 서울에서보다 행복해져있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비가 그친 뒤 해먹에서 내려와 작은 정원을 걷다가 바닥에 뭔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명하지 않은 글자들을 조금 떨어져 하나 하나 더듬 더듬 읽었다.

It's never too late to be happy.



여행 내내 반짝이는 순간들을, 누군가의 멋진 표현처럼 예쁜 조가비를 주머니에 넣는 것처럼 열심히 모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여진이 잔잔히 이어지는 순간들을 열심히 모았다. 나는 아마도 참 많이, 행복해지고 싶었나보다. 이제 됐다,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 충-분히. 내가 충분할 때까지 충분히. 나는 행복해질 예정이다. 아마도 행복하기에 늦은 때는 없으니까.




돌아와서 블로그에 적어 놓은 이 날의 기록에 대해 동행이 댓글을 달았다.


여기 진짜 제일 짱이었던 것 같다 ㅎ

행복합시다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