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도로 가도 되는 곳, 빠이

2017. 10. 05의 기록

by 노니


새벽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금세 더위가 몰려왔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딱 그 시간뿐, 해가 떠오르고 나면 숨막히게 후텁지근해져서 수시로 기운이 빠졌다. 조금 걸어 내려오면 보이던 작은 마을 산책을 하자고 다짐했지만 끝끝내 하지 못했다. 마을까지 내려가기엔 늘 너무 더웠고, 늘 너무 게을렀다.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슬슬 숙소를 나섰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로. 빈티지하게 꾸며진 카페와 그 주위로 대놓고 조성해 놓은 포토 스팟. 덕분에 정원은 온통 중국인 관광객들이었다. 모처럼 에어컨이 빵빵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슬슬 힘이 나서 정원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산책했다. 하늘이 그림 같으니 어느 곳이라도 풍경이 후질 수가 없다. 태국에 있는 내내, 언제나 하늘에 다양한 모양의 구름들이 그득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포토 스팟, 대놓고 꾸며놓은 곳이라도 너무 예쁘다. 풀 속에 들어가서 사진 좀 찍으려고 하면 불개미가 발가락을 따꼼따꼼 물어대고, 에어컨 쐬고 나오자마자 또 덥고, 그러니 땀범벅에 셀카 한 장 찍어볼래도 마음에 하나도 안 들고. 그런데도 좋은 건 좋은 거다. 숨통이 탁 트이는 풍경도 너무 오랜만이고 이렇게 넓은 하늘과 구름도 참 반갑다. 그래서 더위라면 질색인 내가 이 더위에도 아우 죽겠다가 아니라 살겠다 살겠다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눈 앞에서 멍하니 보고 있는데도 그리울 풍경이라는 걸 알겠더라.





점심을 먹기 위해 택시를 불러 메인스트릿으로 내려갔다. 구글맵을 검색해서 평점이 좋은 버거집으로 갔다. 손님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는데 테이블 없이 BAR타입으로 되어 있어 그냥 아무렇게나 옆에 앉아 서로 인사하고 말 트고 하는, 영어 무식자인 내게는 극도로 긴장되는 분위기였다. 태연한 척, 이런 데 익숙한 척, 그러나 사실은 긴장한 상태로. 구석에 앉았다. 딱히 나에게 말도 걸지 않는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나는 유독 수줍어졌다. 곧 건너편의 외국인이 웨얼 아유 프롬, 프리하게 말을 건네 왔다. 영어 잘하는 동행이 대답했다. 매우 활발해 보이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에게 대뜸 여기서 밤에 놀아봤냐고 묻는다. 자기는 지금까지의 파티 중 서울에서 가본 것이 최고 중 최고였다며. 우리는 파티는커녕 해지기 무섭게 집에 들어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뭔가 못 노는 척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실 속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지만.


긴장 속 더운 야외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한 것도 없는데 괜히 진이 쫘악 빠졌다. 확실히 여기는 낮에 별로 할 게 없다. 너무 일찍부터 움직인 우리가 잘못했네. 여기저기 늘어서 있는 투어 상품들을 보며 잠깐 고민했으나, 빠이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곳들은 과감히 모두 패스하기로 했다. 아무 데도 안 가기로 결정.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기로 결정. 더 격렬히 쉬기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도 자꾸만 결심이 필요했다. 날이 밝아 하루가 시작되면 오늘 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편이, 사실은 훨씬 편했다.


커피는 마셨으니 이번엔 차를 마시자며 근처 찻집에 들어왔는데 덥고 늘어지는 분위기 속에 절로 솔솔 잠이 왔다. 꾸벅 졸다가 퍼뜩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잘 꺼면 우리 집 가서 편하게 자야지(읭?). 나온 지 반나절도 안되어 다시 택시를 불러 숙소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한바탕 씻고 책을 폈다. 보드라운 이불에 식은 몸을 비비적대며 책을 읽었다. 이번 여행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 받은 책을 바리바리 들고 왔다. 마지막 출근 날 은지 팀장님께, 나보다 먼저 퇴사의 과정을 겪은 가희에게, 언제나 늘 응원을 건네주는 미영 언니에게.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다. 수시로 위로받았고, 때로는 답을 얻었다.


여행 전 날, 집 앞에서 만난 다영이가 안 어울리게 손편지를 건넸다. 헤어지고 집에 들어와 펼쳐 봤는데 봉투 안에는 손편지와 함께 아니 글쎄, 용돈이 들어있다. 퇴사하고 떠나는 여행, 뭔가 도움되는 걸 해주고 싶었다며. 덕분에 더울 때 고민하지 않고 택시를 탔고, 사고 싶은 건 한번만 고민하고 샀다. 과일도 열심히 먹었고, 좋아하는 커피도 한 잔 더 먹을 수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지만 사실은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나의 다음 스텝을 응원해주는 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느지막이 저녁을 먹으러 다시 메인 거리로 나왔다. 역시. 사방에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고 낮에는 안 보이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야무지게 먹어야지. 코코넛 빵, 카놈 크록. 돼지, 닭, 야채로 속을 채운 교자를 애피타이저로 하고, 망고 밥, 팟타이로 저녁 식사를 했다. 시원한 맥주를 함께 먹을 생각에 신이 나서 슈퍼에 갔는데 술 냉장고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엄청 미안한 얼굴로 오늘은 술을 안 판다는 말을 하셨다. 여기는 술을 안 파는 날이 있다. 아쉬운 대로 탄산수로. 후식은 아보카도 셰이크. 맛있었다. 길거리 음식 모두 성공.




배불리 먹었으니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더 걷다가 허름한 마사지 가게에 들어가 마사지를 받고, 코끼리 치마를 사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들어왔다. 개운하게 씻고, 낮에 읽던 책을 이어 읽다가 잠이 들었다. 파티가 제대로인 서울에서 온 우리, 오늘 밤에도 파티는 없었다.




어느 순간, 내 삶의 속도가 숨이 막히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말았다. 몰랐을 때야 그러려니 살았지만 숨이 막히다고 생각하고 나니 매 순간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내 페이스를 찾는 방법을 잘 몰랐던 나는 아마츄어처럼 그냥 두 발을 딱 멈춰버렸다.


퇴사가 결정되고 이유를 묻는 회사 동료에게 이렇게 허세 돋는 말을 했다. 나는 이제 좀 내 속도로 살아보겠노라고. 그리고 뛰쳐나왔는데 한번 빨라진 걸음은 좀처럼 천천히 걷는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할 필요가 없는 빠이에서도 나는 속도를 늦추느라 몇 번이나 일부러 멈춰 서야 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뇌어야 했다. 굳이 뭔가를 할 필요 없다는 것을 또 스스로 곱씹어야 했다.

졸리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걷고 싶으면 걷고, 멈추고 싶으면 멈춰 서고. 이러고 싶어서 용기를 냈는데 당황스럽게도 내가 졸린 건지, 일어나고 싶은 건지. 걷고 싶은 건지 먹고 싶은 건지. 혼자이고 싶은 건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은 건지. 내 마음에 영 깜깜해져 버려 있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내고 싶은지 스스로가 알 수 없다니, 맙소사.



사바이, 사바이.

태국 오기 전 여행 책에서 배웠던 말을 소리 내어 뱉어봤다. 나에게 말을 걸었다. 편하게 하라고, 느긋하게 해보자고. 여행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아직도 남은 시간이 많다. 게다가 이 곳은 빠이, 아마도 이 곳은 마음껏 그리해도 되는 곳이라고, 마음이 급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