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06의 기록
빠이의 마지막 하늘도 쨍하니, 눈부시게 파랬다.
치앙마이로 올라오는 승합차 안에서 한국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캐네디언을 만났다. 재밌게도 동행과 한국말로 떠드는 걸 듣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대학 친구라는 남, 녀. 여자 쪽은 한국에서 7년 그리고 지금은 치앙마이에서, 남자 쪽은 지금 현재 한국 언양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었다. 언양 불고기의 언양, 한국인인 나도 가본 적 없는 곳. 추석 연휴에 맞춰 여행 온 우리처럼, 남자도 추석 황금연휴를 놓치지 않고 친구가 있는 치앙마이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서로 귀국 일정을 말하다가 자연스럽게 내가 퇴사 후 여행을 왔다는 말을 했더니 여자가 바로 축하를 건넸다. "congratulation" 낯선 이에게 낯선 말로, 갑자기 건네받은 인사에 괜히 얼떨떨해졌다.
호기롭게 퇴사를 결정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홀가분하냐고 묻는데 아직 스스로는 홀가분함이랄지, 좋다고 할지 싫다고 할지, 딱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가끔 내게 벌어진 일들에 내가 제일 낯설어질 때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절대 후회하면 안 돼’라는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워놓고 잔뜩 심각해져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축하받을 일이구나, 축하해도 되는 일이었구나. 그냥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여자에게 치앙마이에서는 얼마나 일할 예정이냐 물었다. 여자는 어깨를 들썩하는 특유의 외국인 포즈를 하며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한국에서도 7년이나 일할 줄은 누가 알았겠냐며.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의 앞날을 누구라서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우습게도 그 말 한마디에 계획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 앞날이, 괜히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구불구불 굽이치는 커브, 환상의 풍경을 뒤로하고 조금 센치해진 마음으로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왔다.
그랩을 불러 반캉왓, 치앙마이의 새로운 숙소로 향했다. enough for life. 여기 또한 매우 기대했던 숙소였다. '반캉왓'은 우리나라의 쌈짓길처럼 넓은 장소에 각종 상점들이 입점되어 있는,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작은 커뮤니티이다. 그중 ‘이너프 포 라이프’는 한국사람(과 태국사람)이 운영하는, 반캉왓 안에 유일의 숙박 시설이었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바깥 풍경 보이게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아마도 빠이의 영향 이리라. 덥지만 에어컨을 켜지 않고 사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반캉왓도 꽤 푸르르구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또 여기는 여기대로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짐을 내리고 숙소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르릉 쾅-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평생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천둥소리였다. 열어 놓은 창으로 시원한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핑곗김에 바로 벌렁 누워버렸다. 도착과 동시에 벌러덩. 원래도 비 오는 걸 좋아하는데 이 곳에서의 비는 얼마든지 여유를 가지고 감상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참으로 성실히 매일매일, 1일 1비.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창 밖으로 기막힌 풍경을 보고 있자니까 커피를 한잔 하고 싶어, 숙소 맞은편 카페에서 후딱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왔다. 커피를 마시고 빈둥대는 동안 조금씩 비가 개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개이면 개이는 대로, 창 밖으로 보는 풍경은 봐도 봐도 좋았다.
치앙마이로 왔지만 여전히 특별한 계획은 없어서 오후 내내 마음껏 숙소에서 자유시간을 보내고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밥을 먹으러 나섰다.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식당이 근처에 있어서 가보기로 했다. 예약은 미리 못했지만 일단 가보자, 하며 나섰는데 마침 쉬는 날인지 문이 꼬옥 닫혀 있었다. 반캉왓 주변의 마을은 길이 꽤 예뻐서 걷는 재미가 있었다.
해가 약간 뉘엿뉘엿 넘어가려 할 때 나왔는데 삽시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대안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나온 데다가 사방은 이미 어두워졌고, 아까 온 비가 군데군데 고여 바닥은 질퍽질퍽하고. 2초 정도는 막막했지만 괜찮다, 혼자가 아니다.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걸어야 할 정도로 어두운 길을 돌아 나갔다. 좀 아까 동네 어귀 현수막에서 본 식당 이름을 검색해서 찾아갔는데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생뚱맞은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맛은 보통, 그러나 저녁을 굶지 않게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적당한 식사였다.
밥을 다 먹고 나와서는 좀 전에 식당을 찾다 마주쳤던 마사지 집을 다시 더듬더듬 찾아갔다. 대만족 정도는 아니고, 그러나 이 어두운 밤길을 훑어 마사지를 받았다는 것으로 우리에겐 만족스러운 마무리였다. 또다시 더듬더듬 길을 찾아 숙소로 돌아왔다.
빈둥 빈둥, 뒹굴대다 보니 하루가 갔다. 동행이 있는 여행도, 계획이 없는 여행도, 분명 낯설긴 하지만 편안했다. 우리는 서울에서보다도 더 적게 말하고 더 적게 움직였다. 더 천천히 움직였다. 돌아와서는 제대로 씻지도 않고 또다시 누웠다. 널찍한 침대 위에 서로 눕고 싶은 곳을 차지하고 누워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하는, 벅찬 시간들이었다.
숙소에 꽂혀 있던 책,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를 꺼내 읽었다. 이렇게까지 다 읽어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한숨에 다 읽어버렸다. 종이로도 전해지는 작가님의 다정함과 편안함이 좋아 설레며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괜히 아련 아련한 마음에, 책의 작가님께 DM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치앙마이를 여행하다가 숙소에 있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장수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지경입니다. 울컥한 순간과 흐뭇한 순간, 킥킥대는 순간들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많은 시간을 주체 못하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만난 귀한 책,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불쑥 메시지를 보내봅니다. 덕분에 행복한 밤입니다.
곧 답장 알림이 깜박댔다. 치앙마이에서 '시간이 아주 많은 날들'에는 어떤 일들이 생길지 궁금해진다는, 남은 여행도 시간이 아주 아주 많은 날들이길 바란다는 내용의 답변이었다. 보내길 잘 했다. 마음 전하기를 잘했다.
한 없이 비 내리는 창을 바라보고 있어도 괜찮고, 계획없이 동네를 헤매도 괜찮고, 한나절쯤 그대로 꼼짝 안 코 누워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려도 괜찮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치앙마이의 시간이 아주 많은 날들, 마음이 저절로 넉넉해졌다. 달라진 게 없는데, 갑자기 대단히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축하할 일이다, 이것만으로도.
'congratulation'
나에게 조용히 축하를 건네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