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07의 기록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더 잘까 하다가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반캉왓 내부를 산책하려고 몸을 일으켜 나왔다. 아직 오픈전인 반캉왓은 고요했다. 산책하고 있는 나의 발소리, 강아지 두 마리가 왕왕 짖는 소리 , 마당을 쓸고 계시는 아주머니의 비질 소리가 전부였다. 정원이 넓은 편이라 꽤 한참 동안이나 쓱쓱- 비질하는 소리가 구석구석에서 들려왔다. 사방 어디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난생처음 보는 이국의 나무와 꽃들. 나참. 진짜 호강에 겨운 풍경이었다. 절로 릴랙스.
우리가 묵고 있는 독채 게스트하우스에서 내려오면 1층에는 잡화점, 우리 방 창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맞은편에는 북카페가 있고, 그 옆으로는 귀여운 간판이 걸린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고 구석으로 들어가면 비스트로, 카페가 아기자기 모여 있다. 반대쪽으로 걸으면 갤러리와 잡화점, 옷 가게, 편집샵, 소품점들도 있었다. 내부가 넓지 않아 금방 둘러볼 수 있는걸 사진 찍고 꽃구경하느라 한참이 걸렸다.
반캉왓 탐방을 마치고 들어오니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린다.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할 때 미리 신청해둔 조식. 문을 열어보니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비쩍 마른 태국 청년이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지금 막 일어난 얼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사와디카-' 인사를 건네고 라탄 바구니를 받았다. 바구니에 담겨온 그림 같은 아침 식사를 감탄하며 먹었지만, 가성비를 따지자면 사실 별로.
아침을 먹고 여유를 부리다가, 맞은편 북카페가 문을 연 것을 확인하고 내려갔다. 오픈 첫 손님, 아직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이라 바깥이 내다보이는 명당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구경하는데 귀여운 태국 책들 사이에 한국 책이 보인다. 《치앙마이, 그녀를 안아 줘》 한글로 쓰인 핑크색 표지가 어찌나 반갑던지. 앉자마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맞은편에는 커다란 팬 선풍기가 돌아가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안 단 아이스 라테 마시며 책장을 넘기니, 캬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여기까지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데 놀랍게도 이 순간 어디선가 아는 노래가 들려온다. 아이유의 가을 아침. 여기 지금 한국인 줄. 치앙마이의 아침과도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선곡, 완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기어코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산책 중에 봐 둔 드립 커피집으로 갔다. 반캉왓 가장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Drip for friends>.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손바닥 만한 작은 부스 안에 훈남 바리스타가 훈훈한 미소로 맞아줬다. 드립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이랄 것도 없어 뵈는 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얼굴에선 줄줄 땀이 나는 더위였지만 왠지 그러고 싶어서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이열치열. 천천히 내린 드립 커피를 홀짝이면서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새 조금씩 땀이 식었다. 자글자글 모기랑 벌레들에게 다리 몇 방을 물려가면서. 반캉왓 안에 있는 어느 가게도 다 마찬가지지만 이 곳, <드립 포 프렌즈>는 특히 자연 친화 그 자체였다. 동행과 나, 둘이 앉으면 만석인 좁고 작은 테이블에서 뜨거운 차와 커피를 즐겼다.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다고 하더니만 건강 체질인 동행이 들어와 눕는다. 열도 나고 춥다고 하는 걸 보니 몸살감기 초기 증상인 듯. 평소 워낙 잘 안 아픈 편이라 서로 당황했다. 일단 경량 패딩을 껴입고 누워있으라 하고, 약을 먹으려면 점심을 먼저 먹어야 할 것 같아 근처 식당서 이것저것 요깃거리를 사 왔다. 내가 뭘 제대로 사온 건지 모르겠다. 국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옆에 있는 국숫집에서 똠얌꿍과 국수를 샀다. 뭔지 모를 땐, 실패 확률이 적은 egg를 찾을 것, egg 뭐라고 쓰여 있는 국수를 사고. 뭔가 고기를 먹이고 싶은 맘에 고소한 냄새가 나는 야외 식당에 들어가서 그릴에 구운 닭다리를 샀다. 혹시 느끼할까 봐 쏨땀도 샀다. 이것저것 정신없이 사 와서 대강 점심을 때웠다. 동행은 몇 술 못 뜨고 약을 먹고 누웠다.
놀러 와서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게 없는데. 그래도 다행히 금방 곤히 잠이 들었다.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같이 누워 낮잠을 좀 자다가, 일어나서 책도 좀 보다가. 한나절이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동행은 일어나질 못했다. 같이 그러고 누워있자니 괜히 나도 몸이 찌뿌둥한 것 같아서 깨지 않게 조용히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잠깐 산책만 하고 들어가야지 하고.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반캉왓 같은 커뮤니티 '페이퍼 스푼'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조리를 직직 끌고 걸었다. 반캉왓보다 조금 더 한산하고 작은 규모의 페이퍼 스푼. 차 한잔 마실까, 뭘 좀 살까 하다가 말도 않고 나온 거라 대강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이 곳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 곳의 장면 장면들이 꽤 기억에 남아 있다. 소박하고 수수했던 창 밖의 풍경, 약간 어둑하고 낡았던 카페의 내부,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돌의 촉감, 크지 않았던 음악 소리와 조용조용 말하던 사람들의 소리, 예쁜 조리와 예쁜 깔개, 예쁜 바닥 예쁜 문.
왔던 길을 돌아 걸으며 조금씩 동네의 작은 가게들을 구경했다.
촌스러운 동네 케이크 집에 들러 핸드메이드 케이크를 샀다. 테이블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가게 안에는 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아가씨들이 편한 차림으로 둘러앉아 커피와 케잌을 먹고 있었다. 나와서 조금 더 걷다 보니 독특한 펫말을 내건 곳이 있어 슬쩍 들여다봤다. <'Sen'Sitive's space> 걸어 놓은 펫말 때문일까, 성큼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더 조심히 들어갔다. 안 쪽에는 코 끝에 안경을 걸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작은 앉은뱅이책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열심히 만들고 계신 게 보였다. 가게 안은 소소한 핸드메이드 작품들이 소박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센서티브 한 공간이라 조심히 들어갔다가 조심히 나오는데 그제야 작가님이 고개를 드셔서 순간 눈이 딱 마주쳤다. 서로의 순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고개 끄떡, 서로 인사를 건넸다.
동네 담벼락의 예쁜 꽃들을 구경하며 남은 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 중, 유명하고 사람 많은 관광지에 가는 것도 좋지만 평점 높은 맛집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낯선 곳에 들어가는 것도 좋아한다.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들을 내가 발견하는 것도 참 좋아한다. 손님으로는 거의 동네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그래서 낯선 이가 들어가면 모두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런 청정지대를 사랑한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그런 불편함도 좋아한다. 대단히 관광지로 여행 와놓고 짬짬이 동네 산책(?)만 하고 있는 이유다. 흐흐. 여기저기 기웃대는 바람에 생각보다 산책 시간이 길어져서 부랴 부랴 들어왔는데 동행은 아직도 쌕쌕거리며 자고 있다. 더 어두워지면 안 되겠다 싶어 깨워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근처에서 한식당을 봐 둔 터였다. 뜨끈한 한국 음식을 먹이고 싶어 갔는데 김치찌개마저도 몇 술 못 뜨고 힘들어했다. 사장님께서 음식 잔뜩 남긴 걸 보시더니 자기가 먹으려고 끓인 맑은 콩나물 국이 있다며 속 진정시키라고 곰방 내오셨다. 감사해라.
억지로 몇 술 뜨고 들어와서는 또 정신없이 눕는다. 오늘은 일찌감치 불을 끄고, 나도 옆에 누웠다.
일주일 내내 야근에 시달리다 돌아온 토요일, 일주일치의 피로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겨우 겨우 일어나, 대강 끼니 때우고. 티브이를 틀고 엉망인 자세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졸다 먹다 자다를 한나절 반복하다가, 저녁 즈음 동네 카페에 나가 커피 한잔 마시고 들어와 다시 잠드는 평소의 주말이 생각나는 치앙마이의 토요일이었다. 이것도 뭐 나쁘지 않네.
누가 그랬다 여행에도 주말이 필요하다고. 토요일 같은 토요일을 보내고 났더니 하루가 금방 갔다. 자야지. 부디 내일 아침엔 동행의 감기가 뚝하고 떨어져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