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풍성했어, 치앙마이

2017. 10. 08의 기록

by 노니


반캉왓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부스스 일어나 창문부터 활짝 열어 마음에도, 눈에도 아침을 가득 담았다. 푸릇푸릇 자연을 담았다. 새 날이라는 건 참 좋은 거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때로는 복잡했던 마음속이 정리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시끄러웠던 속이 조용해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지쳤던 몸이 회복되기도 하고, 무언가를 시작하고픈 마음이 생기니 말이다. 다행히, 푹 쉬고 일어난 동행의 몸은 어제보다 좋아져 있었다. 이만한데 감사. 나 또한 태국에 와서 무더위 속에도 매일매일 잘 자고, 잘 보고, 새 날을 누린 덕에 서울서 출발할 때보다 마음이 훨씬 더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이만한데 감사.



바깥은 모닝마켓의 오픈 준비로 시끌시끌했다. 아침부터 사정없이 비가 오고 있었지만 각자의 노하우로 비를 피해가며 준비 중이었다. 우리는 2층 창에 매달려 셀러들이 각자 부스 설치하는 것을 편하게 보고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슬렁슬렁 내려갔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으나 우리도 요령껏 천막 아래서 비를 피하며 드립 커피와 크루아상을 챙겨 먹고, 여기저기 비닐을 들춰가며 열심히 쇼핑을 했다. 작지만 알찼다. 만족스러운 쇼핑 후 미리 알아 둔 한인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마침 추석 연휴 끝 주일이라 반찬이 엄청 푸짐, 올 추석에 전은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치앙마이에서 전을 먹습니다요.




점심까지 먹고 나오니 하늘이 완전히 개어 있었다. 오늘도 비 온 뒤 맑음. 그림 같은 구름이 한 가득이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JUNJUN CAFE에 갔다. 느낌이 좋았다. 단순하게 ‘잘 꾸며놨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카페를 위해 꾸며 놓았다기보다는, 음(표현력이 딸리는 게 늘 안타까울 뿐) 예를 들어서 표현해봐야겠다. 호텔과 에어비앤비의 느낌 차이라고 하면 될까. 두 곳 모두 숙박을 하기 위한 공간인데, 그 중 누구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흔적을 지워내는 것이 호텔이라면, 공간을 만든 혹은 머무는 사람의 흔적을, 어쩌면 일부러 물씬 남겨 두는 곳이 에어비앤비이다. 카페도 마찬가지. 흔적은 지운 곳과 남기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은 후자,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는 곳이었다. 카페 주인인 준준의 흔적을 굳이 지우지 않은 곳, 손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 호텔은 호텔이라 좋고 에어비앤비는 에어비앤비라서 좋지요. 어쨌든 이 카페만의 이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거.



컵케이크가 20밧. 700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다. 네네 믿기지 않지만 실화입니다. 보다시피 크기가 작아서 딱 세 숟갈이면 끝나지만 컵케이크라는 게 사실 배 채우기 위해 먹는 건 아니니까. 되려 눈으로 먹고, 입으로는 맛만 보는 게 좋으니 이 정도면 딱이다. 밥 먹은 뒤 바로라서 비록 한 개 밖에 못 먹었지만.





4시부터는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 갤러리에서 미리 예약해둔 수채화 수업이 있었다. 수채화라니, 고등학교 졸업한 뒤로 물감으로 뭘 해본 적이 없으니 붓을 잡는 것 자체가 정말 어색했다. 텅 빈 도화지가 우리 앞에 한 장씩 놓였다. 처음은 시키는 대로 네모, 원, 나뭇잎, 원통을 말도 안 되게 그렸다. 물을 바르고 물감을 칠하고. 잠깐의 연습이 끝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식물 그리기가 시작되었다. 하나를 다 그리고 다른 잎이 필요하면 선생님은 몇 걸음 걸어 나가서 사방에 자라고 있는 잎 중에 하나를 톡, 하고 꺾어 왔다. 지천에 그릴 것이 널려 있었다.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자 약간 될 대로 되라의 마음이 되었는데, 근데 분명 솜씨 없이 잘 못 그리는데도 뭔가 신이 났다. 이렇게 집중해서 뭔가를 해본 것도 오랜만이고 미묘한 자연의 색을 물감으로 만들어 낸다는 게 짜릿했다. 예쁜 색과 또 예쁜 색을 섞어서 자연과 가장 비슷한 예쁜 색을 만들어 냈다. 신난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내일이면 동행이 한국으로 떠나니 오늘이 둘이 함께 하는 마지막 밤. 분위기를 좀 내보자며 다시 택시를 타고 올드타운으로 나갔다. 저녁도 먹고 공연도 보고, 거의 매일 숙소에 콕 쳐 박혀 있던 우리의 마지막 일탈(?)이랄까. 여기저기 검색해서 공연이 있는 재즈 클럽 <The mellowship>을 알아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명하고,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엄청 엄청 엄청 좋다는 <north gate>가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 청개구리 들이라서 거기는 패스.

jazz finger style and singer라고 안내된 공연은 기타와 드럼과 특이하게 생긴 악기(아마도 콘트라베이스일까)를 셋이 함께 연주하며 걸 크러쉬 보컬 언니가 노래도 함께 불렀다. 한 시간 반쯤 연주가 계속되었는데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 마음이 노곤 노곤해지는 달콤한 연주였다. 처음 들어갔을 때 한 두 명 앉아 있던 술 손님은,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퇴장, 공연 시간 내내 온전히 우리 둘만을 위한 연주가 계속되었다. 언빌리버블. 듣는 사람이 둘 뿐인데도 최선을 다해 연주해주시는 분들께, 우리도 매 곡이 끝날 때마다 진심 어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들뜨고 신나는 시간, 살짝 기분 좋은 흥분 상태로 즐겁게 감상하고 나서 조심히 팁도 드렸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부터 또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처럼 조금 움직거린 하루였다.


반캉왓에서의 마지막 밤, 한국으로 돌아갈 배낭과 매림으로 떠날 캐리어를 각각 챙기며 괜히 마음이 시큰거렸다. 동행은 배낭에 자리가 꽤 남는다며, 없어도 되는 건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나를 위해 배낭 한 구석을 내줬다. 꽤 긴 여행인데 잠옷으로 입을 티를 한 장 들고 온 똥멍청이 나에게 새 반팔티도 내줬다. 원래 그런 친구다. 이렇게 내내 뭐든 내주고 챙겨줘서 우리의 여행은 한순간도 어려움이 없었다. 부족함이 없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조금 더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지 우리, 참 편한 사이인데도 어쩌면 순간순간 조금씩 예민해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속도가 달라 이리저리 맞추느라 조금은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별 탈 없이, 함께 하는 여행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있었다. 감사히도 서로의 속도를 이해하려 애쓰며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경험하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었으면 안 했을 것들을, 덕분에 많이 경험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들을, 덕분에 많이 알게 되었다. 꼼꼼한 친구 덕에 여행 경비 생각 않고 편히 쓰고 먹고 샀다. 덕분에 조금 덜 헤매고 조금 덜 신경 쓰고, 많이 편안했고 많이 든든했다. 왜 이걸 가기 전 날 밤에야 떠올렸는지.


내일부터 바로 시작될, 어쩌면 조금은 지끈지끈할 수 있는 그녀의 일상과 어쩌면 조금은 외로울 수 있는 여행을 서로 응원하며. 그렇게 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