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디면 어때서, 매림

2017. 10. 09의 기록

by 노니

동행이 한국으로 떠났다. 아쉽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의 뒤꽁무니에 손을 흔들고 들어와서 다시 누웠다. 배웅만 하고 들어왔는데도 땀이 쫙- 나버려서 에어컨을 세게 틀고 옷을 훌훌 벗어버렸다. 나랑 온도가 다른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어딜 가도 굳이 에어컨을 많이 틀지 않았다. 창문 바깥이 워낙 그림 같은 풍경들이라 눈 뜨면 창문 열기 바쁘기도 했고. 오랜만에 에어컨 풀가동에 맨살에 닿는 이불이라니, 한국에서의 익숙하고도 그리운 느낌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매림으로 가기 전, 체크인 시간보다 미리 도착하겠다고 숙소에 메일을 보내 놓고 택시를 불렀다. 예정에 없었던 매림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여행 전 들춰본 가이드북 때문이었다. 작가님의 최애 장소로 그러나, 비중없이 달랑 몇 페이지에 소개된 매림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여긴 꼭 가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검색을 해봐도 아직 매림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없는 편이라 출발 전에는 되레 수선을 떨었는데, 치앙마이에 도착해보니 택시 타고 갔다가 택시 타고 나오면 될 일이었다.


택시 안에서 살짝 잠들었다가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깼다. 창 밖을 보니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한마디로 시골이다. 그것도 엄청. 구불구불 좁은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는데 덜컥 '나도 참, 혼자 여기가 어디라고 왔데.', 슬금슬금 낯섦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다. 시골의 좁은 길, 맞은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오타바이가 택시와 가깝게 스쳐 지날 때, 할아버지 앞에 타고 있던 아이가 손에 든 메리골드 한 송이를 나에게 팔랑팔랑 흔들었다. 큰 눈을 꿈뻑이며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주 보던 내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올라왔다. 스르르- 얼굴이 웃으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확 풀렸다. 긴장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면 뭐, 낯선 곳이면 어떠랴. 그곳에서 누군가와 손을 흔들 수 있다면야.

자신을 fax라고 소개한, 사과 머리를 한 앳된 얼굴의 리조트 직원이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일찌감치 체크인을 해줘서 다행히 바로 독채 숙소에 들어갔다. 완벽히 완벽히 란나스타일의 리조트였다. 부킹 닷컴 사이트에서 봤을 때는, 뭐 굳이 리조트 자체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위치와 가격이 좋고 풍경이 좋아서 어디서건 이틀 정도야, 하는 마음으로 예약했었다. 많이 알아보지도 않고 급히.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옛 란나 왕국의 전통을 간직한 이국적인 느낌의 리조트는 상당히 매력있었다. 이런 분위기 나쁘지 않은데. 침대 위 곱게 놓인 백조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내 손으로 해체시키고 벌렁 넓은 침대에 누웠다. 삼면이 창이다. 여기 바깥 경치가 죽이네. 커피를 마시러 내려가 카페테리아 테이블에 앉았는데 눈부시게 푸른 벼가 익어가는 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우와, 소리가 절로 났다. 내일 아침 산책이 기대되는군.



리조트는 예상대로 우버도 그랩도 검색이 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Fax에게 혹시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지금은 너무 덥고 3시쯤. 밝은 얼굴로 나가기 전까지 방법을 만들어 놓겠단다. 안심이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쉬다가 어슬렁어슬렁 3시쯤 되어서 프런트에 내려왔다. 만능 해결사 fax가 자기의 younger brother가 데려갔다가 태워올 예정이란다. 그리고 300밧. 나쁘지 않다. 차 없이는 매림 내의 이동이 쉽지 않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뚜벅이 여행자인 나는 여차하면 삼시 세끼 리조트에서, 중간중간 논두렁 산책하며 시간 보내야지 뭐 했었는데 다행히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1살의 영거 브라더 푹은 자기 옆자리 문을 열었다. 우버나 택시처럼 당연히 뒷자리에 타려다가 옆 자리 문을 열어주니 혼자 슬쩍 민망해졌다. 그르게 영거 브라더가 내 기사는 아니니까. 옆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잘 웃고 싹싹하고 표정이 다양한, 순한 청년이었다. 잠시도 조용해질 틈 없이 이것저것 말을 걸어오는데 이해한 대로 짧은 영어로 더듬더듬 대답하고 나도 가끔 질문을 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다며, 블랙 핑크, 빅뱅, 갓세븐, 자연스럽게 K팝스타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내 마지막 아이돌은 2PM이었는데 그 얘길 하니 자지러진다. 올드하다며. 크, 누나 나이 되게 많아. 너는 누굴 제일 좋아해 물었더니 뭐라 뭐라 말하는데 못 알아듣겠다. 당연히 여자 아이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읭? 누구? 싱글 가수란다, 누구? 다시 들어보니 오혁, 혁오였다.


오, 신기하다. 혁오를 좋아하는 태국 청년이라니. 그때 푹의 표정이 싹 바뀌며,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그는 정말 너어-무 쿨하단다. 하하.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며 아이폰을 연결해 노래를 틀었다. ohio. 아, 그림 같이 아름다운 매림의 도로를 달리며 듣는 오혁의 목소리라니. 그 순간, 지금 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영화 같았달까. 로맨스 영화까진 아니어도(나참 21살만 아니었어도).



세상에, 세상에.

이 시골에서 차로 15분쯤 달려왔을 뿐인데 세상 힙한 카페와 식당이 있었다. 푹은 아니 한국에서 매림의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왔냐며 신기해했다. 아마 나 같아도 그럴 듯. 가이드 북의 덕을 톡톡히 봤다. 어딘 안 그렇겠는가마는 여기 진짜 자연 그대로의 손대지 않은 황홀한 야외 정원이 흔하다. 무려 흔하다. 야외 정원에 툭툭 무심하게 놓인 테이블에 앉아 모기에 뜯겨 가며 식사하는데, 숲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바로 맞은편에 있는 카페로 갔다. 여긴 또 웬일이래. 분위기가 묘한 것이, 흘러나오는 음악도 범상치 않고. 천장이 높고 조형물들이 커서 뭔가 압도적인 느낌이었다. 카페 인테리어에 비해 메뉴는 투박하기 짝이 없고 커피 맛도 쏘쏘였지만, 분위기로 마셨다.







2시간, 푹과 약속했던 픽업 시간이 됐다. 5분쯤 빨리 나갔는데 마침 차가 좁은 흙길을 덜컹거리며 들어왔다. 냉큼 옆자리 문을 열고 탔다. 돌아가는 길도 역시 조잘조잘, 두 시간 동안 뭐 했냐기에 커피 마시고 뭘 좀 먹고 사진 찍고 책도 조금 읽었다고 대답하는데 뭔가 마음이 따뜻해졌다. 누군가 혼자인 내 시간을 궁금해해 준다고 생각하니 낯선 곳에서 혼자가 된 마음에 금세 온기가 돌았다. 지금 내 마음은 감성 과잉. 미리 준비해 놓았던 빠빳한 300밧을 두 손으로 건넸더니 너무 고마워하며 받는다. 제가 더 땡큐 베리 머치. 덕분에 내가 가고 싶었던 곳, 편안히 다녀왔는걸요.


곧 해가 질 것 같아서 욕조에 물을 받아 푸욱 몸을 담갔는데, 눈 앞으로 미친 풍경이 보인다. 미쳤다. 이건 정말 좀 감동이었다. 숙소 예약 페이지에서 다른 것보다 이 욕조 컷을 보고 여기로 결정했었다. 매림에 간다 했을 때 뚜벅이가 겁도 없이 덜컥 그 곳을 예약을 했느냐며 걱정하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디가 어디면 뭐, 뚜벅이가 시골에 오면 어때서, 이런 하늘을 볼 수 있는데.

실물이 훨씬 멋진 하늘을 보며 통쾌할 지경이었다. 해가 다 지기 전에 가운으로 몸을 여미고 나와 삼면 창 밖의 하늘이 푸르스름한 색으로, 분홍으로, 점점 까맣게 밤하늘로 변해가는 순간을 만끽했다. 방 안에 불도 켜지 않고, 온통 어둠으로 완전히 덥힐 때까지.



내일은 이 분홍색 하늘을, 꼭 직접 대면해야지. 초록도 하늘도 구름도 실컷 보고 가야지.


꼭 해야 할 것도 꼭 가야 할 곳도 없으니 내일의 계획을 이런 것들로만 꽉 채웠다. 그동안 곳곳을 여행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꽤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 매림은 마음이 찡해지는 풍경이었달까. 잘 왔다, 오길 잘했다, 로 시작한 마음이 잘 했다, 그만 두길 잘했다, 로 이어질 때까지 끝없이 감격했다.


낯선 매림의 사랑스러운 밤이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