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0일의 기록
커튼을 치지 않고 잤더니 해가 뜰 무렵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벌떡. 세수를 하고 선크림을 슥슥 바르고 새벽 산책을 나섰다. 또 산책하면 새벽 산책이 제 맛이니까. 해 뜨는 시골길, 아이유의 '가을 아침' 들으며 걷기. 살랑살랑 바람이 가을 같다. 벼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맑게 반짝거렸다.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 그런지 하늘이 이마만큼 존재감이 있을 수가 없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는 뭔가 빛깔도 온도도 좀 따뜻한 느낌이다. 아침 해가 따뜻한 빛깔로 감싼, 이 곳 풍경에 넋을 잃고 또 수억 장 사진을 찍었다. 푸흡. 부지런한 동네 아저씨, 할머니들, 할배들이 내가 지나갈 때마다 눈을 못 뗀다. 이 새벽에 외국인이 논두렁을 걷고 있으니.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씨익 웃으며 사왓디카- 고개 까딱 인사를 건넸다. 사람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게 만드는 아침 햇볕이구나.
산책 후 들어와 조금 더 자고 느지막이 조식을 먹으러 카페테리아에 갔다. 쌀 죽과 계란 프라이, 과일과 떡. 아침에 부담 없이 쌀 죽이라니 좋다. 다 맛있어서 싹싹 비우고 모닝 라테 한잔을 주문해서 마저 천천히 마시고 방으로 올라왔다. 눈 앞에 저런 논이 펼쳐져 있으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너 피스.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욕조에 물을 받아 욕조로 들어갔다. 짠짠 허세샷. 욕조 안 책 읽기는 이동진 기자님의 독서 방법으로 유명한데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이 안에서 책을 읽으며 사진 속 풍경을 보는데 정말 호강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오길 잘했다. 한참만에 욕조에서 나와서 내려가 커피를 주문했다. 룸서비스로 아이스라테를 마셨다. 하, 정말 호강하는 기분의 연속.
제일 더운 한낮에는 블라인드 내리고 깜깜한 방에서 빈둥대다가 해가 조금 기운 다음 동네 마실 겸, 밥을 먹으러 나왔다. 오늘의 유일한 마실. 나갈 채비를 하고 나온 나를 보고 fax가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몇 발짝 나가 입구에서 만난 푹이 또 묻는다, 혼자서 그렇게 하고 어디가? 리조트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식당까지 천천히 다녀오려는 것뿐인데 괜찮겠냐고 자전거 타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보다 멀다고 걱정(?)을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 눈엔 차도 없이 바이크 운전도 못하면서 이 깊숙한 곳에 혼자 묵으러 온 여자 손님 자체가 뭔가 새삼스러운 것 같다. 나는 이래 봬도 구글맵 꽤 보는 여자라고. 아임 오케이 아임 오케이를 호탕하게 외치며 나왔다. 여기 진짜 친절함이 뻗친다.
소박한 시골 동네에 아기자기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걷다 보니 되려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아쉬워라. 또 동네 사진을 수 억장 찍으며 슬슬 걸었다. 거 참 여유롭구먼. 그 말 밖엔. 식당이고 뭐고 진짜 뭐가 없어 보이는 구석, 막다른 골목에서 식당을 찾았다. 어쩐 일인지 종업원들이 다들 어린 소녀다. 메뉴판을 가져다주는 것도 수줍고 다 수줍을 꽃 다운 나이.
타이 식당들은 이것저것 메뉴가 많기도 하고 죄다 못 먹어 본 낯선 것들이라 한 페이지씩 정독을 하다 보면 주문 시간이 엄청 늦어졌다. 그런데 언제고 서버들이 단 한 번이라도 재촉하거나 얼굴색이 변한 적도 없었다. 먼저 양해를 구해놓으면 얼마든지 맘 놓고 고르라고 한다. 한참, 독서하듯 메뉴판을 진지하게 탐독하고 고른 메뉴. 시켜놓고도 사실 뭔지 잘 모르겠다. 일단 애매할 땐 egg가 들어간 걸 골라야지. 계란 들어간 음식치고 맛없는 거 못 봤다. 계란이랑 모닝글로리를 함께 볶은 메뉴와 무난해 보이는 wonton, 완탕을 시켰다. 완탕면 할 때 그 완탕.
한참만에 나온 음식은 너무 예쁘고 깔끔했다. 밥그릇 마음에 쏙 들고, 소스에 띄운 꽃이며 바닥에 깐 나뭇잎이며. 이 시골마을에서 요런 상큼한 비주얼 일 줄이야. 맛도 꽤 좋았다. 아니 상당히 맛있었다. 이렇게 먹어서 6,500원 정도. 진짜 태국은 사랑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어제 체크(?)해둔 선셋 시간대를 맞춰 아까보다 더 천천히 더 천천히 돌아서 걸었다.
빛도 없는 시골길이니 해가 지기 시작하면 금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 되도록 어둠 속에서 금방 들어올 수도록 리조트 근처 길에서 터덜거리며 선셋을 감상했다. 밝았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며 짙은 파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거의 20분 안에 완전히 깜깜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논두렁에 혼자 서서 황홀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조금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뭔가 가슴을 찡하게 하는 곳이다. 이곳 매림은. 하, 예쁘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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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씻고 확인하니 리조트에서 메일이 와 있었다. 나갈 때도 그리 걱정을 해주더니, 들어올 때가 됐는데, 밥 먹으러 간다던 사람이 한참을 안 들어오니 걱정이 됐는가보다. 아 친절함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나 무사히 잘 들어왔다고 답 메일을 보낸다. 내일이면 또 치앙마이로 돌아가야 한다니 괜히 아쉽. 복작복작, 도심에서의 일상도 기대해봐야겠지.
해야 할 일들을 하기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로 하루를 채울 수 있는 곳. 매림은 진짜 좀 사랑입니다. 아- 오길 잘 했다. 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할 만큼, 감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