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무언가를 기록할 때는 매일 느끼는 많고 많은 감정들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시키지 않아도 매일매일을 기록했다. 그런데 요사이, 매일 뭔가를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깨닫는다. 아니 단순히 기록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감정을 놓치지 않고 내 말로 기록 또는 기억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닫는다. 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그리고 체력. 책상에 앉아서 버티는 것도 쉽지가 않다. 퇴근하고 돌아와 식탁 의자, 소파가 아닌 책상 의자에 앉을 일이 별로 없고나 새삼 느낀다.
독립을 하게 되면, 나는 침대보다 책상을 더 잘 꾸며 놓을 거야라고 굳게 다짐을 하다가, '둘 다 잘 꾸미면 되잖아'라는 깨달음에 도달.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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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어느 날, 점심으로 뜨끈뜨끈한 칼국수를 잘 먹고 들어왔는데 내 몸이 뜨끈뜨끈해지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1도 안 들어가고, 시시각각 감기 마귀가 내 몸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게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지경. 처음엔 아이코, 팔 다리에 힘이 쪽 빠지는 걸 보니 감기균에 함락 당했구나 싶더니 그다음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을 수가 없다. 몸이 자꾸 책상으로 거 붙는다. 이마에 열이 차오르더니 두 볼이 화끈화끈, 머리가 띵해서 사고가 멈추고, 눈과 귀, 콧구멍으로 칙칙폭폭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까지 느끼며 더 이상은 안되겠기에 4시쯤 회사에서 나왔다. 집까지 어찌 왔는지 알 수 없...
다음 날 눈을 떴더니 이건 쉬어야 하는 몸. 회사를 하루 더 쉬기로 했다. 남은 연차를 긁어모아 겨울 제주도를 한 번 더 가고 싶었는데... 그냥 회사 갈까, 잠깐 생각하다가 이런 날 쉬라고 연차가 있는 거지, 또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잠들어 버렸다. 결국 회사는 못 갔다. 하루 종일 침대 소파 바닥을 왔다 갔다 하며 자고 또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토요일도 비슷한 패턴. 주일 아침, 3일 만에 바깥공기를 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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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 오는 날, 그러니 반차를 내고 집에 들어간 날 퇴근 후 포르투갈어 과외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었다. 과외에 대한 문의를 하려고 메시지를 남겨 놨는데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급만남을 잡은 터. 아파서 약속을 미루고 다음 날도 아파서 또 미루고, 결국 주일 오후로 약속을 미뤘다. 아직 성치 않은 몸이라 약속을 더 미루고 싶었는데 나를 채찍질하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뭐라도 좀 하자." 요새 회사를 다니는 것 말고는 무얼 특별히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죄책감.
"말만 하지 말자." 포르투갈어 배우고 싶다는 말만 하는 데에 대한 죄책감.
아 쫌, 왜 나는 사서 일을 벌이고, 거기에 죄책감까지 느끼느냐는 말이다.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쩝.
그 두 가지 채찍질에 밀려 약속을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당산동까지 갔다. 나는 이제 달라질 것이다. 뭔가 말을 했으면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은, 난생처음 가보는 동네에서 난생처음, 과외 선생님을 만났다. 고3 때도 안 했던 과외. 과외가 처음이라. 긴장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냥 좋은 분 같았다. 과외를 하기로 했다. 일어나기 전,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 장소로 당산동의 다른 카페 이름을 댔다. 일단 만나야지 하고 나온 자리라서 마땅히 생각해온 장소가 없어서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소 조정을 해보자고 말해야 맞았는데, 그냥 그 순간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했다. 일단 헤어지고, 과외 할 만한 장소를 알아 본 다음에 조정하자고 말해야지. 그 정도 생각. 그리고 그날 집에 들어가는데 걸린 시간이 1시간 30분. 일단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해야 했고, 주말에 홍대 신촌 광화문 동대문을 지나 들어가는 길이 어지간히 멀었다. 솔직히 합정은 자주 나가는 곳이니 당산이 얼마나 먼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또 느낌이 달랐다.
과외 받으러 1시간 반 갈 일 있나. 연락을 했다. 장소 조정을 하자고.
답장이 왔다.
장소 조정은 가능하지만 40분 내 거리는 1시간 30분 과외하시면 1만 원, 2시간 과외하시면 2만 원 올라가요.
아직 과외 시간을 1시간 30분으로 할지, 2시간으로 할지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과외 선생님은 학생이 원하는 곳으로 오는 게 맞지 않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과외비 현금 지출에 큰마음을 먹어야 했는데 한 달에 4번 과외 면 최소 4만 원 추가. 아 타격이 크다. 게다가 회사 근처로 장소를 변경하면 40분 이상. 4만 원 이상의 추가 지출이라면, 부담은 더 커진다. 무엇보다 저 계산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1만 원, 2만 원은 대체 뭐에 근거한 계산인지. 당산동이 아니라면 40분 이내의 거리는 모두 1만 원 또는 2만 원. 택시비인가. 물론 이때도 두 개의 채찍을 열심히 스스로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돈이 추가된다고 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하겠다고 말만 하고 또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결국 이렇게 답장을 보낸다.
과외비가 더 오르는 건 부담스러우니, 그럼 원래대로 당산동에서 뵈어요.
구차스럽다. 금요일로 첫 과외를 잡았다.
주말이 지나고 월 화 수요일이 지나고 과외 전 날인 목요일 오후,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메일로 첫 수업 자료 보내드렸어요. 내일 프린트 해오시면 됩니다.
과외 교재를 내가 프린트해간다고? 클릭해서 확인하니 20페이지가 넘는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어서 보내지 못했다. 퇴근 후 회식이 있어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나, 같은 테이블 동료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노발대발. 스스로 석연치 않았던 마음에 휘발유를 댓통 들이붓고 불을 확 붙인 꼴이다. 내 마음이 화르르 화르르 타올랐다.
거리 추가에 대한 금액 변경은 그렇다 쳐도, 교재를 왜 학생에게 프린트 해오게 하냐고 난리 난리. 동료들의 조언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너무 당연하게 문자를 보내오시니, 나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프린트 못해갈 상황이니 해오시길 부탁드립니다, 답장을 보내라고.
못하는 술을 몇 잔 마신 상태라 엄청 흥분한 상태로 시키는 대로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오지 않았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도 답장은 오지 않는다. 확인하려고 자꾸 메시지 함을 열 때마다 구차스럽게 보내놓은 내 마지막 문자만 보였다. 프린트 못해갈 상황은 또 뭔데. 참나.
아니라고 느끼면 아니라고 내가 느낀 부분을 말했으면 그만이고, 그게 과외를 못할 만한 이유가 되면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지. 이건 좀 심하죠? 이건 진짜 아니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고 내 행동의 근거로 삼기까지 하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라는 듯 조언을 구하고 수동적인 태도로 문자를 보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버럭 났다. 나 뭐하고 있냐... 이 상황에도 힘 없이 두 개의 채찍이 펄럭거렸다. 그래서... 또 안 한다고? 말만 하고...? 모든 게 한심해져서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장문의 문자. 요는 내가 돈 내고하는 수업이니 전부 나한테 맞춰라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몇 번이나 고민하느라 결정이 늦어졌지만 과외 장소, 교재 등의 과외 과정 결정하는 부분에서 마음이 좋지 않아 이대로 과외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 답변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 구차스럽다가 끝났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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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감기는 나았고, 과외는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몇 주 전의 나와 그대로, 바뀐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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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왜 자꾸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왜 무언가를 더 해야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릴랙스하자는 결론. 또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말이다. 또 말만 하고만다는 말이다. 언젠가, 과외는 좀 더 알아보고 하기로 했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똑바로 말하고 조건을 맞추고, 나와 조건이 맞는 선생님을 고르기로. 원래 그렇게 하는 걸게다. 과외라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