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느니.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꿈꾸는 것은 미친 짓이라느니. 별생각 없이 듣고 넘겼던 말들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이래 놓고 또 집에 들어가면 똑같이 살 거면서, 만날 이럴 때만.
세 번째 면접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다. 마음이 착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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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온라인 쇼핑몰 담당자를 구하는 면접이었다. 해외 온라인 쇼핑몰 전담 웹디자이너와 웹 MD를 구하는 공고에 야심 차게 이력서를 냈다. 웹디자이너는 어려워도 MD 정도는 어떻게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난번 면접에서처럼 내가 어느 회사에 지원하는지조차 모르고 갈 순 없다고 생각하며 공고를 열심히 읽고 별것 없는 회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설립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회사였는데, 직원 수가 16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척 성장이 빠른 회사로군.
신규 상품 및 벤더 발굴, 상품 기획, 카테고리 별 거래처 관리, 월별 매출 관리 등의 업무를 하는 MD와 상품 리스팅, CS, 이벤트/프로모션 기획 및 관리, 월별 매출 관리 등의 업무를 하는 웹 MD. 사실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둘 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대 사항 첫 번째 줄에 쓰여 있는 영어 가능자, 영어 능통자는 가볍게 외면하고 두 번째 줄에 쓰여 있는 유관 업무 경력자(2년 이상)에 방점을 찍고 지원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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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보기로 한 날, 하필이면 비가 아주 많이 왔다. 지난번 면접 때랑 똑같은 꽤 캐주얼한 옷차림, 에코백을 들어도 될까 생각했지만 마땅히 다른 대안도 없었다. 회사가 논현역 근처라 지하철을 탔다. '집에서 한 시간은 잡아야겠구먼. 그래도 안 갈아타고 7호선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괜찮네.' 같은 생각을 하며 면접 장소로 갔다. 근처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카페를 일러준다. 카페에 가 있으란다. 예전에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사무실이 변변찮을 때 카페에서 면접을 봤다. 공간이 지저분한데 치울 방도가 없거나, 아예 공간 자체가 없을 때. 어떤 경우일까 생각하며 카페를 찾았다. 신기한 일이다. 카페 앞에 누군가 서 있었는데, 딱 알아봤다. 면접관이로군. 주춤대는 내 몸짓에 상대도 금방 내 정체를 알아차렸다. 내 이름을 조심스럽게 부르길래 맞다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먼저 들어가 있으라기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5개 남짓, 카페 내부가 아주 작았다. 입구 쪽 한 테이블에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 자리로부터 가장 먼 곳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래 봐야 열 걸음 남짓. 안쪽 소파 자리에 앉을까, 바깥 의자 쪽으로 앉을까 순간 고민했지만, 에이 모르겠다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면접관을 기다리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했다. 곧 카페 알바생도 입구 쪽 테이블의 손님도 내가 면접 보러 온 걸 알아차리겠구먼.
조금 더 기다리니 아까 카페 앞에서 본 남자와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함께 카페로 들어왔다. 2:1면접.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고 면접관이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명함을 건네는데, 한 명은 대리, 한 명은 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팀장이라는 분은 예전 회사에서 나 같은 역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회사는 계속해서 급히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 매일 면접을 봐서 사람을 채워 넣는게 일이었던 내 지난 시간이 또 겹쳐졌다. 설명하는 회사 상황에 대해 너무 깊이 공감했다. 면접자가 면접관에게 깊이깊이 공감해서 뭐 어쩌자는 말인지. 일단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면접이 진행되었으나 나도 상대도 계속 한 부분에서 걸렸다. 첫 번째 줄에 쓰여 있는 '영어능통자'라는 절대적인 조건.
'아... 참 괜찮으실 것 같은데 괜찮으실지...' 같은 애매한 말을 이어갔다. 쇼핑몰 경력 덕에 상황을 잘 이해해는 건 마음에 들지만 영어를 못하니 어떻게 일을 맡기나, 내가 생각해도 꽤 애매했을거다. 면접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카페 문이 열리며 누가 봐도 면접 보러 온 복장을 한 여자분이 들어오신다. 검은 치마 정장에 검은 힐, 검은 토트백을 매고 있었다. 나 다음으로 면접을 보러 오신 분이었다. 면접관들은 나에게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는지 서둘러 면접을 마무리했다.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가며 좀 전에 들어온 새로운 면접자 분과 스쳐 지나는데, 내 에코백이 영 마음에 걸렸다. 계속 면접을 보려면 가방이라도 하나 사야할까봐.
여전히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는 빗속을 걸어 집으로 가는 7호선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방금 면접 본 OOO입니다. 귀사에서 오픈마켓에 올린 상품 페이지가 보고 싶은데 혹시 링크를 보내 주실 수 있나요?" 한 30분쯤 시간이 지났으니 면접을 마무리했겠다 싶을 만한 시간에 문자를 보냈다. 영어능통자는 아니지만, 노력해서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예전에 만들었던 의류 상품 페이지를 생각해보면, 사진을 제외한 텍스트는 막상 있어 보이는 느낌의 비슷한 단어들 돌려막기로 간단히 채워 넣기 마련이었다. 그런 식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곧 상대방이 내 문자를 읽었는지, 문자 아래에는 '읽음'이라는 표시가 생겼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동네로 돌아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집으로 그냥 들어가기 싫어 역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몇 주 전, 원치 않던 소개팅에 다녀온 저녁과 꼭 같은 기분. 나도 상대가 그닥이었지만, 상대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너무 눈에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하. 마음이 헛헛했다.
나는 왜 영어도 못하는가, 대체 백수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영어 공부도 하지 않고 뭘 했나, 자책하는 새로운 기준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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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느니.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꿈꾸는 것은 미친 짓이라느니. 별생각 없이 듣고 넘겼던 말들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이래 놓고 또 집에 들어가면 똑같이 살 거면서, 이럴 때만.
인스타그램을 열어 글을 남겼다.
예상대로 답장은 영영 오지 않았다. 합격 연락도 불합격 연락도,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