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거리던 마음이 조금 더 깊이 박혔다

by 노니

돈? 뭐 순간 솔깃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전 회사도 내가 남는다고 하면 급여를 올려주겠다고 했었다. 많은 급여가 필요했다면 그냥 이전 회사에 남았겠지. 적어도 돈 많이 주는 곳이 내가 가고 싶은 회사의 1순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점점 길어지는 면접관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져 갔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야근을 하고, 단 하루도 휴일 없이 출근을 했던 몇 년의 시간들이 또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어느 핸가, 토요일이었던 12월 31일 사무실에 혼자 나와 밀린 일을 하다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러 가던 날, 내년부턴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다짐했던 순간도 생각났다. 내 상상만큼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최악을 경험한 탓에, 경험의 누적으로 자꾸 안 좋은 상상이 더해졌다. 점점 내 반응이 뜨뜻미지근해지자 면접관이 슬슬 말을 멈춘다. 어느새 1시간이 넘어 있었다. 이래저래 과한 면접이었다. 나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면접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밀당 실패. 면접관이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팀장에 지원하는 걸로 하고 해당 업체 담당자랑 임원분 면접 보고 결정합시다. 한 주 안으로 연락드릴게." 그 말에 울상을 하며 웃었다. 빨리 사무실을 나와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생각해보고 아니면, 거절하면 그만이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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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 이번엔 주위도 살피지 않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운동화를 신고 서울역 쪽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일단 연락이 오는지 두고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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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 역 근처로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서울역에서 서울로 7017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뱅글뱅글 끝도 없이 난 계단을 헥헥거리며 올라갔다. 처음 가보는 서울로 7017에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을 지나쳐, 다시 육교를 따라 내려와 충정로 역 쪽으로 걸었다. 복잡해진 머리가 점점 비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벌써 몇 개월이나 전에 들었는데 잘 지워지지 않는 말이 생각났다.

"해보지 않아도 좋은 경험이 있다"

몸이 축날 만큼 열심히 일했고 결국 그 일을 그만뒀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나에게 있어 꽤 큰 사건이었던 퇴사를 말하는 말에 대뜸 누군가 던진 말이었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는 말에 대해, 해보지 않아도 좋은 경험이 있다니. 분명 안타까움이 섞인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어떤 뉘앙스로 저 말을 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고, 그때 저 말이 나에게 느끼게 했던 수치심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다. 어떤 모양이 되었건 내가 이미 살아버린 시간들, 겪은 경험들이, 모두 해보지 않아도 좋았던 것들이었을까 싶어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었다. 아마도 결코 그런 무의미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충정로 역으로 향하는 길, 얼마나 좋은 면접이었건 참 기운 빠지는 순간을 잘 견디고 반가운 이를 만나러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그래도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고 꾹꾹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딱 한 번 들은 말일뿐인데 몇 번이고 상처로 와 닿는 경험의 끝에, 불안해서 두려워서 흔들거렸던 마음이 조금 더 깊이 심지를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더욱 힘을 내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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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전화가 왔다.

1차 면접 합격이란다. 임원 면접 날짜를 잡아서 조만간 다시 연락을 주신단다.

합격 소식을 전해 드는데 먼저 드는 생각, 아니 8월에 쇼핑몰 오픈 예정이라면서 뭘 또 며칠 뒤에 날짜를 잡고 뭘 또 임원 면접까지 본다고. 마음이 편치 않으니 뭐 하나 곱게 보이질 않는다.

어떤 면접이든, 어떤 시간이든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지나가 보자고 결정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던 것처럼. 임원 면접, 까짓것. 월급을 얼마나 달라고 말하면 될까. 조금, 아주 조금 더 깊이 심지를 내린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히 버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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