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건 기록뿐

by 노니

아직 이 전 포르투갈 여행 기록을 마무리 짓지 못했는데, 다음 포르투갈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행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고 말할 만큼(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여행은 만인의 취미이지만 나 또한 여행이 취미라서, 되도록이면 열심히 즐기려고 한다. 평소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하루도 거의 매일 기록하는데 여행이라고 다를까. 더하면 더했지. 매일의 감상을 일기처럼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조금 더 긴 글이나,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블로그에 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얘기는 따로 또 어디다 쓴다. 그러고 보니 참 수시로 쓴다. 여행을 가도 똑같다. 여행하는 매일의 감상은 인스타에 올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날짜별로 여행기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여행기는 일단 블로그에 기록해 내 이웃들과 공유하고, 그 뒤에 여행 카페에 올려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골백번은 했던 말인데 처음 혼자 유럽 여행을 하고 나서 유랑에 올렸던 글이 아주 큰 공감을 얻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짜릿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한다. 이런 사람이다 내가. 카페에 올린 글 하나가 인기글이 되는 경험 정도로도 쉽게, 아주 쉽게 끓어오르는 아주 위험한 사람 말이다.


아마도 내가 쓰는 모든 것이 대단한 기록이 아니라서 계속 계속할 수 있는 것 같다. 대단한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면, 진작 지쳤겠지만. 힘을 빼고 써도 되고, 안 쓰고 싶은 건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면 계속할 수가 있다. 여행기도 사실 똑같은 건데 잘 쓰고 싶다는 욕심과 다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니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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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대한 열심이 생기면서 기록을 위해 스스로 감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없는 감정을 거짓으로 불러일으킬 수야 없겠지만, 스치는 감정을 놓치지 않고 글자로 잡아 두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말이다. 기억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강렬한 감정이 들 때만 기록하던 것에서 한발 나아가 기록을 하기 위해 감정을 잡아두고 기억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 여튼. 생판 남인 사람들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공감해주는 완전히 새로운 자극, 그때의 경험을 잊지 못해 지금도 공감을 갈구하며 계속해서 쓴다.


그때 마음 같아서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당장에라도, 우리 이 글을 책으로 묶어봅시다, 연락을 해 올 줄 알았다. 농담 같지만 진담이다. 내가 이렇게 위험한 사람이다 내가. 그 뒤로 몇 해가 지났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는 않는다. 아니다, 사실 꾼다. 여전히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기대하고 꿈꾸며 여기저기 같은 글을 유포한다. 덕분에 블로그 이웃이 늘었고 업로드 한 글 목록이 늘었다. 이제는 이웃분들의 공감을 갈구하며 계속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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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스타일대로 여행하려고 애쓰고 내 스타일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스타일을 찾는 건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여행을 자주 들여다봐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행을 가봐야 했다.


내가 올린 여행기에 종종 댓글이 달린다. 내 여행에 공감해주고 내 여행을 부러워하고 내 여행을 함께 추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그분들이 남겨주시는 기록에 가끔씩 이런 내용이 있다. '저랑 같은 곳을 다녀왔는데 어쩜 이렇게 많은 것을 느끼셨죠?' 내지는 '저랑 같은 곳 여행하신 것 맞나요?' 같은.


처음에는 칭찬인 줄 알고 으쓱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알게 된 사실, '차이는 기록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버렸네. '모두가 여행 기록을 해야 한다' 내지는 '기록하는 여행이 더 좋다'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행의 기억을 오래, 많이 남겨두려면 기록해라' 내지는 '내 여행에 대해 누군가에게 공감받으려면 기록해라'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자주 듣는 말, "남는 건 사진뿐"과 같은 의미인 거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말을 자주 듣는다 해도 무언가를 남기고픈 마음이 있는 사람만 사진을 찍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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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돌아와 이어지는 여행의 기록 덕분에, 나는 항상 실제보다 조금 더 긴 여행을 하는 기분이 되곤 한다. 기록이 끝나야 여행이 끝나는 것 같달까. 그래서일까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는데, 끝나지 않은 여행기에 대해서는 항상 끝내지 않은 숙제와 같은 약간의 찝찝함을 느낀다. 하지만 찝찝함이 느껴진다고 꼭 숙제를 하기로 마음먹는 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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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또 포르투갈이야? 다시 갈 만큼 좋았어?" 서경이가 물었다.

"뭔가 지금은... 새로운 곳을 여행할 만큼의 에너지는 없는 것 같아." 내 입에 나온 말은 나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서경이가 무척 공감하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이거 꼭 써."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쓴다.


언젠가부터 나는 갔던 곳에 또 가는 여행을 한다. 새로운 곳을 여행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내 취향의 장소를 찾고, 새로운 곳을 궁금해할 에너지가 많이 없는 것 같다. 여전히 낯선 곳에서 약간은 익숙한 공간들을 만들어 내는 정도가 즐겁다. 지금은 딱 그 정도의 에너지로, 내게 맞는 여행을 한다.


그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난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으려고, 오래,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그리고 내 스타일대로 여행하려고 기록한다. '남는 건 기록뿐'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라서 이번 여행은 심지어, 출발 전부터 기록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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