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강남에서 일하기 싫다

by 노니

머리를 대강 말리고 나와 강남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에어컨이 도는 버스를 탔더니 금방 잠이 솔솔 와서, 꿀맛같이 달게 잠이 들었다.


[이번 정류장은 아가방 빌딩 하나은행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다행히 내려야 할 곳을 놓치지 않고 잘 내렸다. 낯선 정류장, 아 역삼동이라니. 으리으리 높은 빌딩들 사이를 걷는 건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이다. 사람이 참 세련이 늘질 않는다.


고개가 꺾어질 것 같이 높은 건물 옆에 또 높은 건물, 그중에 한 건물에 도착했다. 1층 화장실에 들어가 화장을 고쳤다. 노란 조명의 커다란 거울에서 보는 내 얼굴, 오늘따라 더 못났다. 아... 평소 쏙쏙 잘만 말려 있던 머리가 사정없이 바깥으로 뻗쳐있다. 이게 웬일이야. 제대로 말리지 않았더니 머리가 영 푸석해 보여서 그냥 하나로 묶었다. 피부는 윤기 없이 거칠어 보이고, 괜히 자꾸 쪼그라들었다.


_


13층에 올라가 닫힌 문 옆의 벨을 눌렀다. 앳돼 보이는 남자 직원이 나와 인사를 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얼핏 둘러봐도 슬쩍슬쩍 보이는 직원들이 꽤 젊어 보인다. 아니 어려 보인다.


콘텐츠 플랫폼 스타트업 기업의 서비스를 운영팀을 뽑는 구인이었다. [능력과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 인재들이 모여 일하고 있으며...]로 시작된 회사 소개는 다양한 폰트와 다양한 글자 크기의 화려함으로 구직자들을 유혹하던 오늘의 인기 공고였다. 젊은 회사라는 분위기가, 성장하고 있는 회사라는 분위기가 모니터 안에서도 마구 느껴졌다. 고객 관리 / 온라인 CS 관련 경험, IT 운영 업무 경험에 우대 사항이 있다고 했으니 승산이 없는 면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깐 앉아 계시라며 탕비실 한쪽 소파로 덩그러니 어색하게, 탕비실 소파에 앉았는데 갑자기 몇 명의 직원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온다. 목례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알 게 뭐야.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마주쳤지만 금세 눈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목소리를 높인다. 한 명이 익숙하게 도마와 칼을 세팅하더니 뭐라 뭐라 이야기하며 야채를 썬다. 여전히 뭘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명은 영상을 찍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훈수를 둔다. 시끄럽고 활기 넘친다. 여자 둘 남자 둘, 곱게 화장한 얼굴, 대단히 차려입은 건 아니지만 신경 써서 골라 입고 나왔을 옷차림. 뭔가를 발라 갈라 넘긴 머리, 발목이 보이는 바지와 운동화.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청춘 드라마(이런 단어를 고른 자체가 늙은이라는 증거) 속 풋풋한 신입 사원들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_


아, 아득하다. 출근을 위해 신경 써서 화장을 하고,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고, 남자 여자가 섞여 깔깔 농을 던져가며, 동료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들을 가늠해보고. 모든 것이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강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거의 제대로 꾸며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쇼핑몰에서 일하면 옷은 진짜 많이 사는데 멋은 점점 부리기 싫어지는 매직. 물론 사바사다. 나는 그랬다.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데 멋이 다 뭐야.


_


약속된 면접 시간, 정각에 팀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면접실로 안내했다.


"힉"

면접실로 향하며 들여다본 사무실 안쪽엔 빼곡하니 책상들이 붙어 있다.

뭔가 정신없어 보이는 내부.

그 안에서 젊은 직원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다.

그 옆을 지나 면접실에 들어가 앉았다.

저 책상들 중 어디 한 곳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썩 자연스럽게 그려지질 않는다.


면접관이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나도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을 했다.

"나이도 많은데" 내 입에서 이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면접관의 전혀 그렇지 않다는 대답에 순간 깜짝 놀란다. 상대에게 듣기 싫은 말이면서, 나는 참 나에게 잘도 말하고 있다. "나이도 많은데 제가 아직...", "나이도 많은데 제가 이제야..." 같은 말을 거의 접두사처럼 쓰고 있지 뭔가. 너무 후지다. 쓰지 말아야지 절대. 면접을 보며 생각이 이런 생각을 할 만큼 긴장감은 전혀 없는 시간이었다. 30분이 지나자, 칼같이 자르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저희 면접 시간이 30분이라서요."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_


면접실에서 나와 아까 봤던 빽빽한 책상들을 보며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이 조금 숨 막히게 느껴졌다. 꾸벅 팀장님께 인사를 하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더니 왁자지껄 직원들이 나왔다. 괜스레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기가 싫어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아, 여기 13층이었지.'


터덜터덜 13층을 계단으로 내려왔다.

으리으리한 빌딩 사이,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며 생각했다.


'웬만하면 강남에서 일하기 싫다.'

매거진의 이전글날카로운 면접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