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답답한 마음
180807
8시도 안돼서 회사에 도착했다. 내 자리에 앉아 매거진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회의에 그랬다. 제품 표현에 고민을 좀 해달라고.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우리가 판매하는 것이 '옷'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옷을 입다'라고만 반복해서 쓰는 건 좀 질린다는 얘기다. '옷으로 나를 표현하다', '옷을 연출하다'(예가 너무 구리다)같이 좀 다양하게 써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여러 매거진들부터 뒤적였다. 그동안 메모해놓은 표현들을 찾아봤다. 세련된 표현들이 있나 기대하며 좋은 문장과 표현들을 수집했다.
어제 수정해서 보내 놓았던 문서에 코멘트가 달려 되돌아왔다. 코멘트에 맞춰 문장을 다시 수정하고, 확인이 필요한 내용은 다시 한번 정보를 확인했다. 문서의 제목을 수정한 뒤, 다시 메신저로 보냈다. 그리고 답변을 기다리며 새로운 문서 창을 열었다. 제품 설명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혹 아침에 수집해 놓은 문장들을 중 설명서에 넣을 문장이 없나 찾아보았다. 이번 업무도 역시 가이드라인이나 참고할만한 내용이나, 뭐 여타 힌트가 없다. 그냥 자유롭게 만들어 보세요, 하고 나서 피드백을 받는 식이다. 무려 신제품 설명서를 작성하는 것이 내 새로운 업무인데 아직 직접 신제품을 보지 못했다. 신제품에 대한 정보도 물어봐야 알려주는 식이다. 원래 이런 방식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거 알아? 너무 모르면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는 거. 그래서 부실한 내용을 올리게 되니 능력 없는 사람이 되는 그 거지 같은 쳇바퀴. 마음이 자꾸 구시렁대려는 걸 참아본다.
이 뿐만 아니다. 피드백을 빨리빨리 받고 싶은데 순서가 자꾸 뒤로 밀린다. 아마 더 바쁜 문제들이 많을 테지. 당연히 그럴 거다. 신제품 출시에서 제일 중요한 건 제품인데, 제품에 계속 문제가 생기고 있어서 모두 정신이 없다. 그래도 또 내가 작성한 문서를 언제 가져와보라고 할지 모르니 일단은 피드백받지 못한 채로 계속 수정을 해보고 있다. 이렇게 하는 거 맞나. 그러고 있는 사이, 또 새로운 업무가 생겼다. 신제품 관련 카드 뉴스를 제작해야 한다. 아직 주제가 안 정해졌으니 다양한 방향을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다른 사이트의 카드 뉴스를 찾아보면서 방향을 정했다. 주제부터 정해야 할지, 표현 방식을 생각해야 할지, 막 이런저런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다른 레퍼런스를 보다 보니 머리가 띵- 일단 쓸만한 자료를 모아 두고, 창을 닫아버렸다. 아직 기한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그리고는 회사 블로그에 글을 하나 업로드했다. 생각보다 블로그 글을 쓰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8시 전에 출근을 했으니 5시에 나가도 되는데, 차마 5시에는 발이 안 떨어져 어영부영 5시 30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루 종일 나에게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았다. 새로 다니게 된 회사는 모두가 일을 알아서 하는 분위기다. 아닌가, 모르겠다 사실. 각자가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오늘 뭘 한 걸까’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왜 때문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오늘 한 일을 출근 시간부터 되짚어 봤다.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들들 볶는 건 습관인 거지. 아침부터 했던 일을 이렇게 나열하며 적는 것도.
새로운 일이 좋다. 아마도 좋은 것 같다. 매일이 고민의 연속이지만, 고민의 맛이 그다지 쓰지 않고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도 8월에는 하루 정도 연차를 내고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다. 여름은 자주 쉬어가야 하는 계절이니까.
180808
퇴근 버스를 기다리는데 막상 도착한 버스를 보니 도무지 버스에 올라탈 엄두가 안 날만큼 만원 버스다. 그냥 보내버렸다. 만원 버스를 탄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지치는 기분이라. 근처 카페에서 달달한 디저트를 먹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디저트를 먹겠다는 말이 길었다.)
아메리카노와 다쿠아즈를 주문했다. 손바닥만 한 카페라 그런지 <음료 테이크아웃은 500원 할인>이 카운터에 크게 적혀있었다. 조금 있으니 남자 손님 둘이 들어와 테이크아웃 할인을 받아 음료를 결제하고 일회용 잔에 커피를 받더니, 음? 테이블에 앉는다. 잠깐 앉았다 갈 수는 있지.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둘의 목소리가 엄청 커서 손바닥만 한 카페를 가득 채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오래 있는다 싶을 만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기 같은 카페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와 모기 같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죄송한데... 테이크 아웃 할인...”, “나가라고? 나가야 돼 우리?” 엄청 큰 목소리로, 그리고 반말로 직원을 다그치듯 말했다. 나원 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반도 안 남은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손님들이 나갔다. "어휴" 그제야 카페 직원이 조그맣게 한숨을 쉰다.
어휴. 다들 피곤한 하루였나 봐. 나도 좀 그래 사실 오늘. 매일 타는 만원 버스가, 오늘따라 유독 더 버거웠던걸 보면. 그래도 오늘 하루가 어떤 모양이었건 우리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열심히 살았다. 암만.
180810
새 직장의 영향으로 예전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양한 경험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다양한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단시간에 시선을 확 바꾸는데 '직접 하는 경험'만큼 확실한 게 또 없지. 당연한 얘기 하나 더. 새로운 일을 하게 되니 많은 것이 새롭다. 넓어지는 건지, 깊어지는 건지. 확장하는 건지, 성장하는 건지 생각해보려다가 그냥 멈췄다. 이 모든 게 뗄 수 있는 건가 싶어서.
입사 한 지 4주째.
세 번째 이직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낯선 시간을 보내는 내 패턴. 매번 비슷비슷하다. 겁 없이 덤비고 그 뒤에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머릿속이 극도로 복잡해질 때쯤, 이렇게 어설피 시간이 가도 무언가 쌓이는 것이 있구나를 깨닫고 점점 편안해진다. 이 과정 무한 반복.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지금 괜찮은 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나빠진 것은 없다.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게 되니 꺼내 놓기가 두렵고, 생각보다 부끄러운 결과물에 스스로 실망하는 것뿐이다. 내가 내게, 스스로 거는 기대가 커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이 정도 했으면'하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준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는 걸 다 잡는 시간들이다.
입추가 지나고 조금 숨통이 트이니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 머리에 다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조금씩 팔랑팔랑 돌아가는 느낌이다. 길고 지루했지만, 여름이 가고 있다. 또 당연한 얘길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