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질구례, 구례이야기
어딘가 다녀오고 싶었다.
아주 낯선 곳이었으면 좋겠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으면 좋겠고. 거리는 멀어도 상관없다, 시간은 많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원하는 조건을 셈해보니 마음에 남는 곳이 있다. 구례였다. 전라남도 구례.
올 초, 이웃 '낮은 마음'님의 블로그에서 사진 몇 컷을 본 뒤로 계속 구례를 은근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었더랬다. 하동이랑 가까워서 두 곳을 묶어서 여행하는 경우도 많은가 보다. 하동도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지역이라 이동을 염두에 두고 일단은 구례 3박만 예약을 해뒀다. 평일 여행이니 여유롭게 해두자. 거의 매번, 여행 전 날 쯤 되어서야 슬쩍, "나 여행가" 흘리듯 통보하는 습관. 나쁜 습관. 부모님께는 일단 집에 돌아오는 건 주말쯤이 될 것 같다고만 말씀드려 놨다.
남부터미널에서 구례까지 버스로 3시간 10분. 생각보다 가깝지 뭐야. 물론 우리 집에서 남부터미널까지가 한 시간 거리이긴 하지만. 끙.
무리해서 아침 8시 버스 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정말 무리였다. 아침에 일어나 배낭을 챙겼다. 정말로 별거 안 넣었는데 다 큰 조카라도 업은 듯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비도 와서 우산까지 써주고. 추적추적. 사실은 비 오는 날 차 타고 어디 가는 걸 좋아해서 '출발부터 운이 좋군' 생각했더랬다.
늦지 않게 도착해서 무사히 버스를 탔다.
약속한 시간대로 11시 30분이 조금 안돼서 구례에 도착했다.
구례가 지리산으로 유명한(?) 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구례 다녀왔다 하면 지리산 다녀왔어? 하더라. 산에는 아직 흥미가 없는 편이라 이번 구례에서는 지리산 등반을 시도하지 않았다.
숙소 주인분의 친절한 설명 덕에 숙소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터미널과 가까워서 도보로 이동이 가능해서 좋았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숙소 위치가 꽤 중요해지는 것 같다. 물론 나의 경우에. 3박을 도미토리룸으로 예약했다. 숙소 비용을 아끼자, 퇴직금 없다, 월급도 없다. 짜디짠 짠돌이가 되었다. 체크인은 4시라서 짐만 얼른 맡겨두고 노트북과 지갑을 챙겨서 나왔다. 일단은 동네 산책쓰.
# 동아서점
오, 서점 발견. 무려 동아서점이다. 보유 서적의 95%가 참고서인 곳이었다. 아마도 구례 읍내 유일의 서점인 듯.
문이 잠겨 있으면 전화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서 슬금 들어갔다. 비스듬히 눕듯 앉아 있는 자세로 손님을 맞아주시는 사장님, 인사를 하고 "참고서 말고 읽을 만한 책이 좀 있을까요?" 여쭤봤더니 자신 있게 베스트셀러 코너를 알려주신다.
내려오는 길에 구례에도 작은 동네 책방이 있는가 싶어 찾아봤는데 아마도 (아직) 없는 듯했다.
사장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니, 유후- 책장 딱 4칸에 동아서점이 큐레이션 한 베스트셀러가 꽂혀있다. 음...
초대박 신간 《여행의 이유》도 있다면서, 여전히 앉은 듯 누우신 채로 내 뒤통수에다 책 추천을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발 빠른 독자, 여행의 이유는 이미 읽었답니다. 《언어의 온도》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책은 사지 않았다.
# 평화 식당
구례에서의 첫 끼는 육회 비빔밥이다. 육회 비빔밥이 차갑지 않다. 돌솥은 아니지만 돌솥비빔밥처럼 밥이 따뜻하다.
노란 주전자에 담아 주시는 보리새우 국물을 끓여서 함께 먹는 게 궁합이 좋았다.
# 구례 읍내
곳곳에 도로 공사하는 곳이 많았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결혼 광고. 익숙하게 '국제결혼'을 보다가 '국내 결혼'을 보니 낯설다. 참한 북한 여성이라니.
# 구례공공도서관
구례북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던 구례공공도서관. 서울 도서관 카드로 구례에서도 책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 이미 많이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책이음 서비스가 잘 되어 있다. 신이 나서 도서관에 들어갔는데 정기 휴관일이었다. 도서관에 오기 전, 읍내 산책을 하면서 들렀던 카페 티읕도 급 휴무, 목월 빵집도 휴무, 카페 무우루도 휴무일이었다. 랄랄라. 월요일 만세다! (물론 문을 여는 곳도 많이 있다.)
조신하게 산책이나 계속 해야지.
# 카페 팀버
그렇게 산책을 하다가 '이제 진짜 커피 마시고 싶다' 싶을 때쯤 카페를 발견했다.
이번 여행에는 책읽아웃의 오은의 옹기 종기 목요일 코너 [어떤 책임]에서 캘리님이 살짝 언급하셨던 《두 늙은 여자》를 가져왔다.
여행에서 읽고 싶어서 출발하기 전날 구매했다. 책을 읽고 노트북을 열어 기록을 정리했다. 이번 여행 제1의 목적은 10개월간의 회사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흩어져 있는 10개월 동안의 신입사원으로의 기록을 하나로 이어 정리하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나를 기록하려할까.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내 얘기를 질릴 만큼 쏟아내고 나면 나 아닌 누군가에 대해 기록할 수 있게 될까. '이제 됐다', 싶은 순간이 찾아올까. 나는 아직도 충분치 않은 게 분명하다. 아직도 쏟아낼 나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 구례옥잠
체크인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구석구석이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난 이렇게 디테일이 있는 곳이 좋더라. 누군가의 색은 디테일에서 결정되는 법이지. 가꾼 이의 취향이 충분히 반영된 공간 속에서, 머무는 매일이 즐거웠다. 사진은 차차 풀어야지.
도미토리룸 2층 침대에서 1층 침대를 선점하고 누워 구례에서 갈 만한 곳을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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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하는 여행에서 최근, 외로움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여행을 하면서 혼자인 게 좋은 건 분명한데, 외로움이라는 감정에는 좀처럼 넉넉해지질 않았다.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박대를 했다. 왜 외로워? 감정을 다그친들 어쩔 건데.
떠나오기 전엔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다.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돈을 들여 떠나야 한다니(어쩔 수 없는 건데 퇴사 후하는 여행에서는 좀처럼 넉넉해지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한동안 익숙한 곳을 다시 가는 여행이 좋았는데 오랜만에 낯선 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 마음이 생긴다면 뭐 또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그래서 낯선 곳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평화로운 구례를, 조심조심 살피듯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