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다면 35세까지

by 노니


몇 분 간격으로 각종 택배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진택배, 로젠택배, 대한통운까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두 개는 집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오고, 그리고 하나는 회사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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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북클럽 웰컴 키트.

며칠 전 얄미언니가 선물을 보내왔다. 북클럽 회원권. 세상에나.

받아본 것 중에 손에 꼽을 만큼 기쁜 선물이었다. 며칠이나 행복한 마음이 지속되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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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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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내가 아침 금식 중이다.

12시 30분, 점심시간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데 4일 동안 잘 지키고 있어서 대견하다.

그러면서 4일 동안 매일 생각했다. 아침이 이렇게 길구나.


출근하면서 사간 커다란 사이즈의 라테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오전 업무가 끝나 있곤 했는데

물론 간식도 중간중간 먹고.

이번 주는 아침에 일 말고 할 게 없다. 지루하다. 말은 바로 해야지, 입이 지루하다.

나는 정말로 입이 심심해서 뭘 먹는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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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전 회사 앞에 현수막이 걸렸다. 구에서 운영하는 글쓰기 강좌에 관한 현수막이었다.

무려 무료 수강, 대상은 '일을 하고 있는 20-30대 노동자'라고 쓰여 있었다.

글쓰기 수업 매니아에다가 일을 하고 있는 30대 노동자는 1초의 고민도 않고 바로 신청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안내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무료 강좌이다 보니 그렇겠지만, 참석이 확실한 건지 중간 확인 문자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이어지는 내용을 확인하는데 대상의 문구가

'일을 하고 있는 20-30대 청년 누구나' 그리고 괄호 안의 내용

(가능하다면 35세까지)였다.


가능하다면,

35세까지.


나는 올해로 37세가 되었다.

내가 끼면 이 모임은 '가능하다면 35세까지'라는 조건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된다.


혹시나 해서 답장을 보냈다.


35세 이상이라... 확인 한번 부탁드립니다. 저는 83년생입니다.


금방 답장이 왔다.


가능합니다!


가능하다면 35세까지, 그러나 37살도 가능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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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로 바짝 첫 수업의 시간이 다가오고 오늘 다시 한번 확인 문자가 왔다.

지난번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오늘도 문자에서 그 글자만 보인다.

'가능하다면 35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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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자 가만히 있자. 문자 보낸 사람이야 뭐 위에서 내려온 내용을 고대로 써서 보낸거겠지.

이 사람한테 말해서 뭐하겠어. 가만 있자.

꾹꾹 눌러보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에세이 쓰기 신청자입니다.

'가능하다면 35세까지'의 문구가 마음에 걸려 연락드립니다.

나이 제한에 관한 문구를 꼭 넣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한나절이 지나고 답장이 왔다.


청년 대상 사업으로 기획을 했는데 아직 연령대 파악이 안되는 신청자분들이 있어 그렇습니다.

35세는 참여 가능하며 혹여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

아직 연령대 파악이 안되는 거랑 가능하다면 35세까지의 문구의 상관관계를 전혀 알 수 없다.

청년 대상 사업이라 연령대 파악이 중요한 거였으면 애초에 모집 시 나이 파악을 정확히 했어야 한다.

그리고 진행 미숙으로 제대로 된 파악이 안되었다면 차라리 답장을 요구할 때 정확한 나이를 묻던가.

가능하다면 35세까지는 참가자들이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담당자들이 알고 있어야 할 기준 아닌가.

처음 보낸 문자에서도 나이를 확인한 게 아니면서 뭔 연령대 파악?

게다가 마지막 저 말은 뭔가.

35세는 참여 가능하며 혹여 불쾌하면 죄송하다니.


생각이 저만큼 더 앞서 나간다.


짐작건대 아직 담당 직원은 35세가 되지 않았으리라. 물론 이건 짐작이다.

그리고 아침부터 온 예민한 37살 민원인의 날선 문자를 보며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만에 보내기 싫은 답장을 보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 속 장면들이기 때문에 쓰면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냥 지울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또 답장을 보냈다.


불쾌하다기 보다...

기획자가 프로그램 대상자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처음에 공지되지 않았던 기준이 '가능하다면'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으로 추후에 더해졌기 때문에

경계에 걸쳐 있는 입장(?)에서는 볼 때마다 약간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보내 놓고 마음이 좋지 않아 금세 문자를 하나 더 찍어 보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모르겠다. 그냥,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싶다. 괴롭힌건가. 흐흐.


나는 나이에 많이 민감한 편은 아니다. 아마도.

나이에 민감해서, 불쾌해서 저런 문자를 보낸 건 아닌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무진장 그런 감정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섬세하지 못한 표현이 싫었던 것 같다. 다음번에는 좀 더 세심한 프로그램 진행과 문자 작성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하필 내가 만으로 35살이었을 뿐. 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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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집에 왔다. 오늘도 12,000보를 걸었다.

걸어오면서 본 풍경, 그냥 예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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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찍지는 못했지만 더 아름다운 풍경도 만났다.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는데 어린아이 두 명이 위아래로 방방 뛰며 아빠를 부른다. 양손을 흔들고 난리가 났다.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쪽을 바라봤는데 버스가 한 대 멈춰 서 있고 사람들이 줄줄이 내리고 있었다.

어머나.

아빠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 엄마랑 두 딸이 마중을 나온 상황.

그 감격의 상봉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걸음을 늦췄다.

이윽고 기다리던 아빠가 내렸는가 보다.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뛰던걸 멈추고 앞으로 튀어 나간다.

"왜 나와 있었어?"

그다지 풍부한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아빠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몇 걸음 걷다가 그냥, 한 번 더 뒤를 돌았는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자기에게 달려든 두 딸을, 아빠는 모두 안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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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느라 서 있는 대형 고속버스 앞에 이렇게 쓰여있다.

HAPPY BUS TO YOU


버스를 타고 오면 못 봤을 장면들을 오늘도 많이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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