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출근을 했다. 맙소사. 걸어서 출근이라니. 입사 9개월 만에 처음 해보는 일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현상, 바로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으면 생기는 현상이다. 나도 봤다 드디어, <걷는 사람 하정우> 사실 어제 집에도 걸어서 왔다. 마찬가지로 입사 9개월 만에 처음 해보는 도보 퇴근이었다. 그동안 걷기를 시도해보지 않았던 건 아닌데 중간에 포기하고 버스를 타곤 했다. 안타깝게도 회사랑 집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길이 걷기에 좋은 길은 아니기 때문에.
여튼 어제저녁에는 걷기 좋고 어쩌고를 떠나 그냥 걸었다. 회사에서 나왔을 때 머리가 너무 아팠고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에. 꽉 막힌 길과 만원 버스를 보고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걸을 수 있는 데까지는 걸어가 보자'
회사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5.9km 카카오 맵으로 찍었을 때 도보 1시간 31분 거리. 사실 걸으려면 충분히 걸을 만한 거리다. 그동안 엄두를 못 냈을 뿐.
대표에게 회사를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고 말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한번 퇴근하기 전에 한 번 더. 복잡한 기분은 걷기에 좋은 이유가 되었다.
어제는 11,944걸음을 걸었다.
앞으로 불가능한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만보 이상씩 걸을 생각이다.
참으로 느슨한 계획이네. 가능한 날은 걷는다.
오늘은 아침 8시 전에 집에서 나왔다. 힘들면 버스를 타야지 싶으면서도 백팩을 메고 나왔다. 웬만하면 걷겠다는 의지. 중간에 고비가 찾아왔지만 무사히 걸었다. 누가 보면 국토대장정인 줄. 그냥 걸어서 출근했을 뿐이다. 아침엔 더 부지런히 걸어서 어제보다 10분쯤 시간을 단축했다. 사무실 의자에 앉으니 등이 약간 촉촉한 느낌이었다.
고난주간 두쨋날,
아침 묵상을 했다.
'북한의 이웃이 되는 삶'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묵상을 적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웃이 되고,
이 땅의 모든 희생자들의 이웃이 되고,
내 옆자리 동료의 이웃이 되고,
오늘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북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게 해주세요.
기도했다.
오후 2시쯤 내 자리 전화기를 수리해주러 기사님께서 오셨다. 기사님께 자리를 내드리고 박카스를 가져다드렸다. 기사님께서 이런저런 말을 물으시고 내 전화로 다른 직원들에게 내선 연결을 해보라고 시키셨다. 평소에 내선을 연결할 일이 많이 없는 편이라 약간 버벅대면서 한두 번 실수를 했다. 기사님께서 뭐 하냐 혼자 바쁘냐며 왜 그러냐는 식으로 약간 무안을 주셨는데 기분이 확 상했다. 순간 기분 나쁜 티를 확 냈다.
계속 내 옆에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일하셨는데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상했을까. 그냥... 그 말투와 그 순간이 모두 싫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티를 냈으면 기사님이 가기 전에 곁에 와서 조그만 목소리고 아까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고 하고, 나가셨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혼자 기분 좋게 출근해 묵상을 한 아침에는, 주님 내가 모두의 이웃이 되겠노라고!
거창하고 듣기 좋은 말로 기도문을 적을 때까지만 해도 예상에 없던 순간이었다. 부끄러웠다.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기사님을 속절없이 보내놓고 남은 시간 부끄러움을 가득한 오후를 보냈다.
퇴근하고 걷는데 하,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은 회사에서 점심도 각자 자리에 앉아서 옆 사람이랑 얘기하면서 도시락을 먹는 편이다. 출근을 해서 퇴근하기까지 내 자리에서 서른 걸음 이상(화장실도 아주 가까운 데 있다)을 걷지도 않은 하루였다.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기도 쉽지 않은 법이다. 그나마 내 자리에 걸어 들어온 이웃에게는, 내 마음에 조금 들지 않는 말을 했다고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속 좁은 인간이 나다. 맙소사. 너무 거창했던 내 아침 묵상이 떠올라 하, 헛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길을 걸어서 퇴근하는데 연한 봄의 색이 이어졌다. 여린 잎들, 순한 빛깔의 벚꽃잎, 차분한 하늘과 노을의 색. 딱 봄의 색이었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작년 이맘때 화랑 유원지에서 봤던 하늘이랑 닮았다고 생각하며 넋을 잃고 감탄했다. 내내 작년에 갔던 합동분향소의 풍경을 마음속 어디인가에서 리플레이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느 때와 같을, 해 질 녘 하늘을 보는데 단박에 그날의 아름다웠던 하늘이 떠오르는 걸 보니.
오늘도 만보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