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토요일 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있어 일찌감치 나왔다가,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들어가는터라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피곤해. 그때였다. 눈 앞에, 내가 좋아하는 노선의 버스가 정차했다. 우리 집에 가는 버스 말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무슨 낭만일까. 눈 앞의 버스에 올라탔다. '아, 집에 가야 하는데.'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몸은 이미 빈 좌석을 찾아가 앉고 있었다.
몇 정거장 가는 동안 빗줄기가 더욱 거세진다. 어두운데 비까지 오니, 기대했던 풍경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멍청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노란 불이 켜져 있는 작은 가게가 보였다. 사방이 깜깜한 밤, 빛을 밝힌 작은 창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창문에는 ‘책방’이라는 글자가. 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벨을 누르고 열린 뒷문으로 바로 내렸다. 오늘은 어차피 이런 밤이다.
버스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란 불빛이 한결 더 따뜻하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점 안을 지키고 있던 사장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서점은 천천히 둘러봐야 5분도 채 안 걸릴 만큼, 아담한 크기였다. 몇 마디 인사 같은 말들을 나누고 버스를 타고 지나던 길에 노란 불빛을 보고 내렸다고 하니 무척 좋아하셨다. 사장님은 낯선 밤손님이 반가운 듯, 정적이 찾아올 만하면 번번이 말을 걸어주셨다.
원래 이 동네 주민이고, 원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사장님께서는 정해진 기간 동안 이 공간을 빌려 자유롭게 서점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계속 더 듣고 싶은 신기하고도 재밌는 이야기였다. 오픈 시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가끔 저녁에 술 약속이 있을 때는 문을 닫고 들어가는 날도 있다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손님은 나처럼 때가 맞아 지나가다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 많아야 하루에 대여섯 명 정도란다. 그렇게 들어오는 손님들과 또 마음이 맞으면 한-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런 손님도 없는 날은 바깥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사람을 구경하기도 한다고, 시한부 서점 주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도 훌쩍, 한 시간을 넘겨 이야기를 나누고 서점에서 나왔다. '그럼 저는 시한부 서점 문이 닫기 전에 다시 꼭 한번 들를게요, 다음에는 너무 깜깜하지 않을 때 와서 요기(길이 내다보이는 자리) 앉아서 책을 좀 읽다 갈게요.' 약속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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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버스 안, 까만 창 밖을 들여다보다가 좀 전에 사장님의 말이 생각나서 슬며시 웃었다. 내내 수다만 떨다가 서점을 나가기 전, 그래도 책 한 권은 사야 할 텐데 싶어 급하게 책을 훑어보고 있으니 사장님께서 손사래를 치며 말씀하셨다. "일부러 안 사셔도 돼요.", "그래도..." 말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사장님께서 조금 더 확실한 말투로 덧붙이신다. "저 아까 동네 아저씨께 책 한 권 팔아서 오늘 할당량 다 채웠어요, 오늘 할 일 다 했으니까 정말 일부러 안 사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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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할당량, 하루 책 한 권.
적당한 때에 서점 문을 열고 하루에 책 한 권을 파는 것이 목표라면, 오늘 내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 다섯 명을 만나는 걸로 충분하다면, 그들 중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한 시간쯤 사는 얘기를 나누는 걸로 즐거울 수 있다면...! 창 밖으로 낯익은 동네 강아지가 지나가는 걸 보는 순간이, 사랑하는 우리 동네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는 걸 내다볼 수 있는 순간이,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이, 마음 깊이 행복하다 행복하다 느낄 순간이 얼마나 많을 수 있을까. 숨길 수 없이 부러워졌다.
"아 좋겠다 너무 부러워요." 내가 세상 부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사장님이 웃으신다.
"왜요, 버스 타고 가다가 우와 저기 들어가 보고 싶다, 하면 내려서 들어올 수 있는 여유 가지고 사시잖아요."
"그러네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공주님은 왕자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서점에서 슬쩍 들춰본 동화책의 마지막이 생각난다. '내 속도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내가 정한 할당량을 채웠다면, 그것으로 오늘 하루는 참 행복했답니다', 로 마무리하기에 공주와 왕자가 끝까지 정말 끝까지 함께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스스로 정한 할당량대로 하루 한 권씩 책을 파는 낭만적인 서점은 시한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나도 알고 있다.
평생 동화처럼 살자는 이야기도 낭만적인 이야기가 마냥 부럽다는 것도 아니다. 매사에 만족할 수 없었던 내 할당량은 결국 스스로 정해놓은 것이고, 남의 옷을 입은 것 같던 불편한 현재의 자리는 결국 스스로가 데려다 놓은 곳이라는 것. 번번이 숨 막혔던 내 속도는 스스로 늦출 수밖에 없고, 결국 스스로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몰라 흘려버리고,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넘겨버리고, 큰 문제없으니 삼켜버렸던 내 마음속 이야기들은 결국 스스로가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의 오늘 하루 할당량은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정해야 하는 것임을, 할당량에서 ‘타인’이 빠지니, 적어도 오늘이 행복할 수밖에. 적어도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으로 오늘의 일탈은 참으로 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