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운동하실 때 따라 나갔다가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 쉬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놀이터 맞은편에 있는 어린이집의 놀이시간이었는지 아이들이 놀이터로 뛰어나왔다. 아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놀이기구 중 하나인 그네는, 안타깝게도 이미 만석이었는데 오륙 학년쯤 되어 보이는 소위 노는 오빠, 노는 형들이었다. 아이들 몇몇이 올망졸망 모여들어 포기할 수 없다는 듯 그네 주변을 맴도는 것을, 어느새 아빠와 함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마침내, 의지를 담아 큰 소리로 외쳤다. “양보해 주세요!” 한 아이가 대놓고 말하자 나머지 아이들이 따라 외쳤다. “양보해 주세요오-” 머쓱해진 노는 오빠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네에서 슥- 내려왔다. 아이들은 그네에 날름 올라타 또 아무렇지도 않게 “고맙습니다아아”라고 합창을 했다. 목표 달성.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아빠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이가 무기고만.”
네다섯 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꺼내 휘두른 것이 상당히 재미있다. 하고 싶은 것을 뭐든 입 밖에 내 말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을 뭐든 입 밖에 낼 수 있는, 아마도 ‘그래도 되는 나이’.
티브이 오디션 프로그램 결승에 오른 두 팀에게 진행자가 질문을 했다. “OO팀이 우승할 수밖에 없다 하는, 팀의 무기가 뭔가요?” 상기된 표정의 오디션 참가자가 우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세울 만한 강점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흘러가는 화면 속에서 그들이 내세웠던 각종 능력이라는 강점은 서로에게 독이 되어 과한 결과를 불러왔다. 반면 실력이 조금 밀린다고 생각되었던 상대팀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여 좋은 결과를 보여줬다. 극적인 재미를 위한 악마의 편집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좋아 보이는 것이 꼭 목표 달성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데에 누구도 토를 달기 어려울 거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의외로 강점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는 말이다. 골리앗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완벽한 왕의 갑옷이 필요할 것 같고 오디션에서 1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곡 해석 능력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꼭 필승의 무기가 되는 건 아니더라는 것, 왕의 갑옷을 벗고 자기 손에 맞는 돌팔매를 들고나가 골리앗을 싸워 이긴 다윗의 이야기를. 멀리서 성경에서까지 찾을게 뭐 있나. 그네를 타기 위해, 아이들은 마치 약점 같아 보이는 어린 나이를 내세우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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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축구 선수가 꿈인 초등학교 4학년, 열한 살 남자아이의 이야기였다. 가정 형편이 조금 어렵고, 부모님이 안 계셔서 할머니와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래도 꽤 평범했던 이 아이에게, 갑자기 골육종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암세포가 다리뼈에 심하게 퍼지게 되자 아이는 결국 다리 하나를 절단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노상 축구만 해대던 4학년 남자아이가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자, 아이의 삶은 당연히 송두리째 흔들렸다. 우울해하는 아이를 위해 항암치료 중, 며칠 휴가를 받아 학교에 가는 장면이 나왔다. 어색해하던 친구들은 다행히 금세 예전처럼 아이에게 다가왔다. 얼마쯤 반가워하다가 한 친구가 아이의 비어있는 바지 한쪽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진짜 없네.” 친구의 말을 들은 아이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걸 보는 내 표정만 일그러졌다. 방과 후,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온 아이가 카메라 쪽을 향해 제작진에게 말을 건넸다. “OO이가 부러워요. 걸을 수 있잖아요.” 그쯤 되니 가슴이 미어졌다. 화면 속 아이는 볼을 바닥에 딱 붙이고 누워 주절주절 상실감을 말하다가 마지막 지나가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누구에게나 무기는 있어요. 하나씩은 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가 있어요.”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눈에는 아이가 말하는 그 ‘무기’라는 것이 쉽게 보이지 않았지만, 정작 본인은 절망의 시간을 지나오며 스스로 희망의 무기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강점이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조차 의미 없다 생각했던 약점이 무기가 되기도 하기에. 때마다, 상황마다 약점이 또는 강점이 되기도 할지언정, 다행히도 누구에게나 무기는 있다. 그래서 아마 우리 모두는 괜찮다. 약자라도 괜찮다. 부족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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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아이들을 보던 이 상황에서 생뚱맞게 갑자기 다큐멘터리 속 아이의 그 말이 떠올랐다. 역시 깨달음에는 나이가 없다고, 열한 살 아이가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조용히 중얼거린 그 말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며 공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