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동안 거의 가지 않았던 집 앞 카페를 다니게 되었다. 인테리어도 영 촌스럽고 음악도 내 스타일이 아닌 데다 아마도 주 고객이 될 동네 아주머니들이 들어오시면 카페 안이 금세 떠나라 시끄러워지는 것 때문에 오픈하고 몇 년간 한 두 번 가본 것이 전부였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라테가 무려 3,300원으로 값도 합리적이고, 맛도 괜찮고, 낮 시간에는 손님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아주머니 사장님께서 말이 많지 않으신 편이라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자주 가서 오래오래 자리보전하고 있는 나 같은 손님에게 어필하는 장점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며칠 동안 심한 감기로 꼼짝없이 집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 증상이 조금 좋아지고 몸이 풀리니 금세 커피 생각이 났다. 츄리닝 바지를 꿰어 입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집 앞 카페에 갔다. 평소 같으면 먼저 좋아하는 자리를 선점하고 커피를 주문하러 가겠지만 이 날은 들어가 바로 주문을 하고, 음료가 나오는 곳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은 여느 때처럼 무심히 그러나 처음 들어보는 친절함을 담은 목소리로 물어보신다.
“오늘은 그냥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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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회사 근처에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카페가 바로 대학가 근처에다 그 옆에 해당 구의 세무서가 있어서 하루 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지만 묘하게 붐비는 느낌은 없는 곳이었다. 출근 손님에 맞춰 일찍 문을 열고, 학생 손님에 맞춰 늦게 문을 닫고. 게다가 연중무휴라는 믿을 수 없는 성실함으로 카페를 운영하는터라 나 또한 성실하게 들렀던 카페였다. 퇴사를 하고 나니 딱히 들를 이유가 없는 동네의 카페가 됐지만, 집에서 1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방문 횟수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커피도 맛있고 밀크티도 맛있는 데다가 공간이 쾌적하니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꽤 어려 보이는 남자 사장님은 신기할 만큼 공평한데 그게 참 대단히 새로운 매력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데 누구에게도 더 반가움을 더한다거나 덜어내는 것 없이 그저 모두에게 같은 톤으로 동등한 친절을 담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이어 역시나 그 톤으로 주문을 받는데, 어쩜 몇 년을 갔는데도 꼭 필요한 것 외의 말을 붙이는 걸 본 일이 없다. 시키는 음료가 차가운 거냐 뜨거운 거냐, 영수증이 필요하냐 외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카페 주인이라면 친절이라는 이름을 붙여 건넬 수도 있는 사적인 말 한 번을 건 적이 없었다.
얼마 전 카페에 들렀다. “어서 오세요.” 예의 그 공평한 목소리였다. 마침 좋아하는 자리가 비어 있어 기쁘게 자리를 잡고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했다. “따뜻한 밀크티 주세요.” 평소라면 바로 이어서 영수증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오늘은 밀크티 위에 우유 거품을 조금 더 풍성히 올려드릴까요?” 아마도 이건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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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 어쨌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오늘은’이라는 말이 더해진 말 좀 들은 게 뭐가 대수라고.
그러게, 근데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나는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오늘은’이라는 말은 나의 오늘뿐 아니라, 나의 어제를 아는 사람이 건넬 수 있는 말이기에. 지극히 사소한, 사소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사소한 것이 마음에 와 스치고 만다. 무언가가 와서 스치고 나면, 그곳에는 사소한 온기가 생겨난다. 신경 써서 알아채지 않으면 금세 식어버리고 말 정도로 지극히 사소한 온기일지라도. 나는 아마도 그런 사소한 것들이 스쳐 만들어 내는 온기를 알아채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온기를 품고 와 닿는 것의 사소함을 놓치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자주, 아무것도 아닌 말 하나에도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고 고이 마음에 품는가 보다. 온기를 품은 말을 되받은 사이는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고, 그리고 그런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