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수) 구름
아침 산책을 하다보면 아무리 일찍 일어나 나가도 늘 누군가는 일하고 있다. 일하러 나가시는, 혹은 들어오시는 할머니들을 마주칠 때마다 열심히 인사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내 인사를 잘 받아주셨다. 심지어 운동 다녀오냐고 물어보시는 다정한 분도 계셨다.
어제 있었던 인터뷰 채록 정리를 도와드리겠다고 말했다. 예전에 교회 편집부에 있으면서 인터뷰 채록 받아 적는 일을 몇 번 했었는데 그게 생각나서 바로 말씀드렸다. 아니 정말 신기한 일이지 뭐야. 내가 했던 경험들은 어디 안 간다 정말. 즐거웠던 편집부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괜히 경희 언니에게 연락해서 추억 팔이를 했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러고 보니 월요일부터 내리 삼 일째 점심에 면을 먹고 있다. 오늘은 칼국수를 먹었다. 뜨거운 면을 땀 흘리며 먹었다.
점심 먹은 뒤, 또 답사. 주말에 있을 행사를 위해 슬쩍 향청에 다녀왔다. 근사한 공간 앞 정자에는 더위를 피하는 할아버지들이 나와 앉아 계셨다. 한낮의 더위는 정말 속수무책이니까. 할아버지들이 우리에게 놀다 가라고 하셨다. 헌팅 당했다.
내가 살고 있는 숙소. 한옥집이다. 안에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도 따로 있어서 불편한 건 크게 없다. 사무실과 걸어서 딱 10걸음이라 출근길의 빡셈이 없다는 것도. 화장도 신경 써서 할 필요 없고, 옷도 그렇고. 나는 너무 좋다. 이렇게 쓰니까 서울 서는 꽤나 신경 쓰고 다녔던 것 같지만. 전혀.
오후에 잠깐 비가 왔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한 달 밖에 안 된 직원이 계신다. 점심을 먹는데 그분이 그런다. 서울에서 일할 때 쓰던 '기업은행' 계좌 관련 업무를 봐야 하는데 이 지역에는 기업은행이 없어서 '김천'까지 갔다 오셔야 한다고. 그리고 김천 간 김에 스타벅스도 다녀와야겠다고. 지금 내가 있는 지역은 스타벅스가 없다. 공차는 있다. 버거킹도 있다. 우리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 내가 거래하는 은행들을 여기서는 한 번도 못봤다. 여긴 무조건 농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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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나서 아무것도 안하고 쉬고 싶었지만 방이 불안정하니 좀 정리가 필요하긴 했다. 혼자라면 언제 짐 정리를 했을지 모르는데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쓴다는 건 어떤 면에선 참 좋은 일이다. 물론 어떤 면에선 조금 불편한 일이고.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막상 솔을 들고 화장실 바닥을 문지르다 보니 기분이 엄청 상쾌했다. 맞아 나 이러려고 여기 왔잖아. 편한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잘 살아보려고 왔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바닥을 솔로 박박 문질렀다. 나중에 서울에 올라가서도, 계속 잘 할 거다. 여기 온지 사흘 만에 숙소 정리를 마무리하고 기분이 째져서 치킨을 먹었다.
마, 이게 힙이다. 반반에 만육처눤. 치킨 사면 요구르트도 주신다.
특이한 건 프라이드 찍어 먹으라고 주시는 간장 소스인데 보통의 간장 치킨의 간장 맛이라기 보다 걍 진짜 양념한 간장 맛이다. 근데 후라이드에 찍어 먹으니까 겁나 맛있다.
치킨을 먹으며 <소공녀>를 봤다. 아껴뒀던 영환데 얼마나 좋은지, 영화를 보면서도 다시 한 번 더 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봤다. 미소에게는 생각과 취향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기준에선 그 취향이 염치없는 것이 되고만다. 그녀만큼 염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데. 이 세상에 정말 염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영화를 다 보고 룸메가 그런다. "서울의 젊은이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새로운 관점이었다. 미소가 지역으로 내려왔더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가사도우미 일은 조금 더 구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음에 드는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바'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차가 없으면 이동이 무지 불편하니 미소는 집보다 차가 더 급해졌을지도 모른다. 아... 지역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이건 서울의 문제는 아니다.
아직 상이 없어 치킨을 바닥에 놓고 먹다 보니 어느새 둘 다 누워 있었다. 누군가와 한 공간, 한 방에 사는 게 처음이라 마냥 편하기만 할 순 없지만 혼자였으면 훨씬 더 낯설었을 공간들이 덕분에 때때로 덜 낯설다. 분명히 감사할 일이다.
먹먹하게 어두운 덕분에, 이곳의 달은 참으로 쨍하고 선명하게 밝다. 참 예쁘다.
무엇이든 하나의 면만 가지고 있는 건 없다. 어두워서 밝아지는 것, 불편해서 안도하게 되는 것이 있지.
맞아, 나 이러려고 여기 왔지. 아직은 모든 면에서 시간이 필요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