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2의 기록
부지런히, 더워지기 전에 숙소에서 나왔다. 목적지는 와로롯 시장. 서둔다고 서둘러 나왔는데도 걷자마자 덥다. 오늘은 안 되겠다. 일단 아침부터 먹어야지, 포기가 빠른 여자. 참새가 방앗간을 지날까, 힙한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일찍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갔다. (와로롯 시장은 여행 끝까지 이런 식으로 미루다 미루다 결국 못 갔다.)
든든하게 한 끼로 손색없는 샌드위치와 아이스 라테를 먹고, 오는 길에 봐 둔 헌책방으로 갔다. 장서가 꽤 많은 편인데 비해 정리가 정말 정말 잘 되어 있었다. 어찌나 책 보관 상태나 내부 청소 상태가 좋은지 깜짝 놀랐다. 찾는 책이 있어 물어봤더니 꽤 구체적으로 위치를 알려주셔서 또 놀랐다. 책 분류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내가 찾는 책이 2층에 있을 거라고 안내받고 올라갔는데 방금 청소한 것처럼 반딱반딱 바닥이 깨끗해서 맨다리로 털석 앉아서 책 구경을 했다. 수많은 영어책들을 보며,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수화물에서 책 무게는 덜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나 읽을거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태국 점원 언니의 경쾌함과 아이리쉬 주인 할아버지의 유쾌함은 꽤 좋은 조합이었다. 할아버지는 묵직하게 카운터에 앉아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하고, 오고 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고, 먼지 뭍은 책들을 손질하셨다. 점원 언니는 서점을 여기저기를 종종 가볍게 움직이며 서점을 정리하고, 연신 깔깔거리며 손님에게도 주인 할아버지에게도 쉽게 쉽게 말을 걸었다.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책을 표지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옆에 와서 과감히 비닐을 북- 찢어주신다. 보고 나서 사지 않아 미안한 표정을 짓자 넘나 쿨하게 괜찮다며, 여긴 원래 그런(그냥 보고 가는) 곳이라며 손을 휘휘 내 젖는다. 원래 사려던 책은 못 샀지만 마음에 드는 시집을 골랐다. 레너드 코헨의 <book of longing> 캬 제목 좋고. 안에 일러스트도 표지도 너무 예쁘다. 잔뜩 쌓여 있는 책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것이 헌책방의 묘미인데, 마침내 찾아내기까지 했으니 그 기쁨은.
또 쉬엄쉬엄 볕을 피해가며 걷다가 2층짜리 대형 문구점을 발견하고 얼른 들어갔다. 반캉왓 숙소에다 펜을 놓고 와서 며칠 어찌나 불편하던지. 학교 졸업한 지가 까마득한데 아직도 문구 사는걸 그렇게나 좋아한다. 신나게 구경하고 펜 몇 개를 사서 나왔다.
그런데 어디쯤에서 흘린 걸까, 아침에 들고 나온 2000밧에서 1000밧을 꺼내 아침을 사 먹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나머지 지폐들이 없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감도 안 와서, 찾을 수도 없었다. 한화로 따져보면 그리 엄청 큰돈도 아니라 이 정도면 다행이지 하며 ATM기에서 생활비를 조금 더 인출했다. 그리고 통장에 남은 돈이 얼마인가 잔고를 보는데 잔고가 없다. 사실 잔고가 없는 건 매우 익숙한 상황이고, 그것보다 이젠 월급날이 되어도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진하게 와 닿았다. 맞다 나 이제 백수지. 여행 중 찾아온 첫 번째 우울,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 빈 잔고를 채워 줄 월급이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런데 10분이나 지났을까. 그만 배시시 웃고 말았다. 우울하고 자시고 불쑥 이런 공간이 나타나버리니 감탄하고 말았다. 아, 좋다.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행복해져 버렸다. 예쁜 벽화들, 키가 큰 나무들, 떨어진 핫핑크 꽃잎들. 세상에나, 낭만적인 풍경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골목 끝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 두 개, 큰 테이블 하나가 다닥 붙어 있고, 아마 옹기종기 끼어 앉으면 6-7명이 겨우 들어갈 만큼 좁다. 다행히 내가 갔을 때는 아직 손님 한 명뿐, 작은 카페 싫어하지 않으니 내 마음에는 쏙 들었다. 포토그래퍼이기도 한 카페 오너가 찍은 사진으로 꾸며진 내부는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힙했다. 그리고 주문한 커피, SOMPETCH. 이건, 커피가 아니라 예술이잖아요. 한 잔 원샷하고 두 잔, 세 잔 종류별로 마셔보고 싶은 맛이었다. 아침에 마시고 점심에 마시러 가고, 저녁에 또 마시러 가고 싶은 맛이었다. 너무 맛있었다. 눈으로 입으로 먹는 커피라서 사진이 함께 있는 메뉴북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뒤적뒤적 옆에 놓인 태국 잡지를 들춰보는데 빼곡히 채워진 태국 글자들 사이에 눈에 확 들어오는 글자들이 있었다. THE HAPPINESS MAKER.
태국에 와서 때때로 생각하게 되는 '행복(Happy)' 스스로 있는 힘껏 행복해지자, 다시 한번 다짐해봤다. 커피를 다 마셔갈 즈음, 맞은편에 여자분이 혼자 들어와 앉았는데 아마도 한국 분 같았다. 내 자리에서 보는 그녀 쪽의 풍경이 아주 그만이라 할까 말까 할까 말까 2초쯤(거의 안 했다는 얘기) 고민하다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보는 구도가 너무 예뻐서 그런데, 사진을 좀 찍어드려도 될까요. 하고 싶은 건 특별히 못된 게 아닌 이상 하는 거다. 말 걸고 싶으면 걸고. 혼자 여행하다 보면 예쁜 내 사진 찍기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기쁘게 핸드폰을 내미셔서 사진을 찍어드리고 부끄러니까 바로 인사하고 나왔다. 아까보다 조금 더 행복해진 기분.
카페에서 나와 거리를 구경했다. 독특한 느낌의 디스플레이가 인상적인 잡화점에 들어가 살 거 뭐 있나 뒤적 뒤적하고 있는데 누군가 주인 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가게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아! 앗, 앗. 상대도 1초쯤 있다가 날 알아보고 에에- 하며 놀랐다(알고 보니 일본인, 이해가 가는 리액션이다). 엄청난 리액션을 하며 반가워해준 그녀는 지난 주말 반캉왓 선데이 모닝 마켓에서 물건을 팔던 셀러였다. 그녀와 남자 친구가 우리 숙소 계단 바로 곁에 물건을 늘어놓고 있던 터라, 우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계속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기에 무슨 얘긴가 들어봤더니 숙소에 대해 묻는다. 가격이 얼마냐, 어디서 알게 되었냐, 어디서 예약을 하냐. 우리도 참 오지랖이지 그렇게 궁금하면 올라가서 내부를 볼래? 하고. 어질러진 방을 열어 구경시켜줬다. 그런 인연을 며칠 만에 여기서 만나다니. 여기까지만 해도 반가운 우연인데 이게 끝이 아니다. 그날 이후, 들고 다니던 가이드 북을 뒤적뒤적하다가 한 페이지에서 눈이 멈췄다. 사진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마켓에서 만났던, 남자 셀러. 그러니까 방금 우연히 만난 그녀의 남자 친구를 가이드 북 속에서 발견한 거다. 웨이트!라고 말하고 가방에서 얼른 가이드 북을 꺼내서 페이지를 넘겼다. 이걸 발견했을 때 본인에서 직접 펼쳐 보여주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는데. 페이지를 펼쳐 사진을 보여주니 그녀는 깔깔 배를 잡고 웃는다. 너무 좋아하면서 자기 남자 친구도 곧 올 거라고 잠깐 기다려 줄 수 있냐고 하며 핸드폰으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이어서 들어온 남자 친구, 책을 펼쳐 사진을 보여주니 내색 없이 씨익 미소만 짓는다. 남자 친구 더러 책을 들라하고 사진을 또 찍었다. 아우 이런 우연이, 이런 인연이. 괜히 너무 기분이 좋아져 살까 말까 고민하던 브로치도 샀다. 커플과도, 친절했던 주인 언니와도 반가운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나의 남은 여행에 행운을 빌며, 그들의 예쁘고 분주한 청춘에 행운을 빌며. 아, 또 생각지도 못한 순간들. 별 거 아닌 이야기다. 그래도 이전보다 더, 조금 더 행복해졌다. 해피니스 메이커.
맞은편에 또 기가 막힌 크래프트 샵이 있어 고민 고민하다가 천 가방 하나를 사버렸다. 기분 좋은 쇼핑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TCDC디자인 센터로 갔다. 전시가 있을 줄 알고 겸사겸사 들른 건데 국왕 서거일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전시실 앞에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전시는 열리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디자인 도서관이 있고, 여권을 지참하면 관광객 연 1회라는 정보를 보고 찾아갔건만, 규정이 바뀌어서 무조건 누구든 100밧. 왔으니 들어가 보자. 건물도 멋지고 도서관 내부 또한 굉장히 잘 꾸며 놓았고, 디자인 책과 매거진들도 많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중간중간에 컴퓨터도 배치되어 있어서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쾌적하고 신경 써서 잘 만들어진 곳이었다. 좀 쉬었다 나가자 하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땀도 식히고 책도 보고 시간을 보냈다. 잘 누려 놓고도 못내 100밧이 아쉬운 자린고비.
마지막으로 직접 바인딩한 노트들을 판매하는 바인딩 전문샵에 들렀다. 노트 덕후에게 필수 코스. 자기가 좋아서 만들어 쓰기 시작한 바인딩 노트를 사람들이 관심 갖고 좋아하는 걸 보고 아예 전문샵을 냈다고 한다. 모두 손으로 직접 만드는 거다 보니 한 권 한 권이 조금씩 모양이 다르다. 예쁜 게 너무 많아서 고르는데 한참 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가 직업이 되었다는 멋진 주인 언니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키득대며 미드를 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많이 돌아다닌 탓인지 너무 피곤해져 과일 주스를 물고 눈 앞에 바로 보이는 툭툭을 잡아탔다. 10여분을 달려서 숙소에 도착해서 내리려는데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매연이 어마어마하다 정말. 숙소에 들어가 씻고 나와 바로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국물 요리를 하나 더 시킬까 하다가 말았다. 매연을 잔뜩 마신 탓에 속이 더부룩했다.
예쁘고 후끈한 밤거리를 걸어 들어왔다. 언제 잃어버렸는지 모를 지폐에도, 텅 비어버린 잔고에도,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는 날씨에도, 밤이 되면 온 몸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지는 햇빛 알레르기에도. 사실은 큰 문제가 없다, 뭐가 이렇게 맨날 좋은지 모르겠다.
툴툴거릴 새도 없이 매일 예쁜 거리에 감격하고, 싸고 맛있는 음식에 감동하고, 마주치는 이들의 환한 미소와 친절에 설레고, 생각지 못한 우연에 즐거워진다. 다행이다, 아마도 나는 행복해질 줄 아는 사람이라서. 열심히 열심히 행복해질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서.
우기가 끝나가는 걸까,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비를 뿌리던 하늘이 오늘은 내내 쨍했다. 이제 가방에서 우산을 빼도 괜찮은 때가 된 것 같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