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3의 기록
올드타운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이제 숙소 옮기고 나면 여기를 산책할 일이 없을 테니’ 이유를 붙여가며 또 일찌감치 나왔다. 아침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특히 하나를 꼽으라면,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고요함이다. 이 고요함은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쓱쓱 비질하는 소리가 유난히도 조화롭게 들린다.
여기저기서 맨발의 승려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쪼글쪼글한 파파 할아버지 승려까지.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시장은 이미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시장 근처에서는 쉽게 탁발 의식을 볼 수 있었다. 바삐 걷던 승려들이 아마도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나보다, 여기 다 모여있다. 시장 입구에서는 탁발 패키지(?)를 늘어놓고 팔고 있었는데 한 개를 사는 사람, 혹은 수십 개를 사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아이 손까지 붙들고 나온 한 가족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거겠지. 사람들은 정성껏 바치고 승려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 익숙한 풍경이 아니라 생경한 느낌이지만, 그건 알겠다. 받는 사람도 바치는 사람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 선한 마음이다. 누구라서 나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정성껏 봉양을 할까.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해자를 따라 걷기로 했다. 바깥 풍경이 더 좋다. 아무래도 시장 구경이나 마트 구경에 별 흥미가 없는 것 같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샌다고, 한국서도 생전 안 가는 마트며 시장이니 나와서도 별 다른 게 없다.
해자 근처는 이른 시간인데, 차도 사람도 많았다. 해가 뜨자 금세 땀이 줄줄 흘렀다. 어쩌자고 더위라면 질색인 내가 여름 나라에 여행을 와서 하루에 샤워를 네댓 번씩 하고 있나. 땀이 흐르기 시작하니 가벼운 산책이 어느새 극기 훈련이 되어 버렸다.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다.
거나하게 씻고 조금 눈을 붙였다가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했다. 오늘 드디어 마지막 숙소로 옮겨간다. 체크인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많이 남아 짐을 맡겨놓고 나왔다. GRAPH CAFE에 다시 왔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올드타운을 떠나면 다신 못 올 것 같아서 득달 같이 다시 왔다.
오늘은 손바닥만 한 카페에 이미 훈훈한 금발의 외국인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네 명만으로도 이미 가게 안이 꽉 찼다. 내가 들어가자 안쪽으로 들어와 앉으라고 자리를 만들어줬다. 퐌타~스틱, 언빌리~버블, 어어~썸. 그들이 엄청난 리액션으로 커피맛을 표현하고 있어서, 나는 속으로만 환호를 보냈다. 꺅. 오늘의 커피는 lost garen. 어쩜, 이름도 로맨틱하지. 커피 위에 올라간 건 장미꽃 잎이다. 장미수에 커피를 낸 듯, 커피에서 꽃 향기 맛이 났다. 맛도 맛이지만 비주얼 진짜 훌륭하다.
커피를 마시고 나와 골목골목을 선선히 걷는다. DO MORE OF WHAT MAKES YOU HAPPY, 오늘도 길에서 행복을 배웁니다.
이런 말에 가슴이 찡하고 나면, 그때부턴 같은 걸 봐도 다른 걸 본다.
길거리 풍경 다 사랑스럽고요.
길가의 꽃은 또 참 시리게 예쁘고요.
아기자기 벽화는 언제나 사랑이고요.
근처에 있는 유명 국숫집을 갔다. 한 젓가락 집어 드는데 머리카락이 나왔다. 조용히 걷어내고 먹었다. 특별히 머리카락에 좀 비위가 약하긴 하지만, 별 수 있나 참고 먹었다. 그렇게 거의 다 먹었는데 국물에 벌레 한 마리가 떠 있다. 헤헷. 젓가락을 내려놨다. 한쪽에 붙어 있는 CLEAN FOOD 간판이 무색한 청결함이었다. 올드타운은 한 집 걸러 한 집이 마사지 집 이래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사지 샵이 많았다. 마사지나 받고 가자 싶어, 2시간짜리 코스로 마사지를 받고 노곤 노곤해져서 나왔다. 올드타운 안녕-
마지막 숙소에 도착했다. 아, 이제 여행이 딱 일주일 남았구나. 이번 숙소는 치앙마이대학교 후문 쪽에 있다. 미녀 호스트가 친절하게 열쇠를 넘겨주고 떠났다. 마지막 에어비앤비에 도착하고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곳의 청결함은 우리의 청결함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비하하는 거 아니다.
혼자 쓰기에 꽤 넓은 편이라, 넉넉히 좋았다. 산이 보이는 창 밖 풍경 좋고, 식탁 겸 테이블이 넓어서 좋고, 침대 넓어 좋고. 화장대 있어 좋고. 좋고, 좋고. 좋은 것만 보자. 짐을 대강 풀고, 빠이에서 산 작은 빗자루를 꺼내 바닥과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머리맡에 책을 꺼내 놓는 것으로 모든 짐 정리가 끝났다. 지내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지만 청결하지 못한 첫인상은 꽤 오래 남았다. 흑.
숙소 주변을 둘러봐야겠다 싶어 가볍게 나왔다. 새로운 숙소에 왔으면 주변을 좀 걷는 게 내 습관인 것 같다. 단돈 20밧짜리 크레페를 먹으면서 한 시간쯤 주변을 걸었다. 확실히 기온이 내려간 듯, 땀이 덜 난다,
BOOK RE:PUBLIC 서점에 도착했다. 첫눈에 보자마자 알았다. '나는 이 곳을 좋아하게 될 것이야.' 치앙마이에서 나의 최애 장소가 되었다.
이 곳만의 특징인 Book Re:commendation. 모든 책은 아니지만 몇몇 책에 추천 코멘트, 별점이 붙어 있었다. 한 글자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죽 둘렀는데 한 책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한글이다. 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 태국어 판이다. 별점 평균이 4.5는 되니 꽤 괜찮은 평가다. 설마 10개가 만점은 아니겠지. 크크.
태국어의 글자 모양이 너무 매력적이라 모든 책 표지가 다 예뻐 보였다. 이곳은 영어로 된 책도 거의 없다 싶을 만큼 태국어 책만 가득했다. 테이블과 소파가 있어서 앉아서 책 보기에도 좋고, 차도 팔아서 차만 마셔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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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는 길 치앙마이 대학교 후문 근처에서 열리는 야시장을 구경했다. 매일 다른 메뉴를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큼의 많은 메뉴들이 있어, 매일 밤 고르는 재미에 신이 났다. 이 곳은 관광객들보다는 확실히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많았다. 로컬 느낌 물씬.
오늘 메뉴는 스테이크, 테이크아웃 해와서 먹었다.
에어비앤비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1층에는 세탁소, 음식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이 하나 있었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고 책상에 앉아 있기도 하고 목이 긴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지켜보니 아마도 학원인 것 같다. 밤 10시가 넘어도 항상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고 아이들은 책상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일요일도 열려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림동 학원가 같은 것일까. 치앙마이 대학 앞에 보습학원이라니. 매일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안쓰럽고 괜히 귀엽고, 이모의 마음이었다.
생각해보니 태국의 교육제도나 교육열, 학교 등,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래도 유럽이나 서구권 나라들에 대해서는 티브이나 책에서 보고 읽기라도 하는데 태국에 대해서는 참 무지하구나 느꼈다. 여행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못 보던 것을 보게 한다. 견문을 넓힌다, 라는 구태의연한 표현이 사실은 굉장히 적절한 거다. 돌아가면 태국의 교육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안 와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와보는 사람은 없다는 태국, 그중에서도 치앙마이. 딱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낮에 길에서 본 문장에 새삼 떠오른다. DO MORE OF WHAT MAKES YOU HAPPY. 남은 시간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로, 더욱더욱 채워가야지. 길 건너 밤새 길고 긴 야시장이 열리고 있는데도, 참으로 조용하고 고요한 밤이었다.